조여정이 좋아서 하는 일

기승전‘일’로 모든 대화가 흘렀다. 배우라는 직업 덕분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좋아서 하는 연기는 여전히 재미있어서 문제다.
BY | 2016.02.12
드레스는 살바토레 페레가모.
20대의 조여정은 고민이 많았다. 동글동글한 얼굴이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데 한계가 되진 않을까, 어떻게 그 한계를 풀어 나가야 할까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반복했다. 고민의 실마리는 영화 <방자전>을 만나면서 조금씩 풀려 갔다. 영화 <후궁>과 최근 작품인 <인간중독> <워킹걸>을 이어가며 본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묻고 실험했다. 예쁘고 인형 같은 단편적인 이미지를 가졌던 20대의 조여정은 다양한 층위의 이미지들이 촘촘히 덧입혀진 30대의 조여정이 되었다. 새로운 진폭을 그려내는 일이 그녀에겐 본능적으로 즐거운 일이 됐다. 20대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는 그녀의 말은 진심처럼 단단했다. 촬영이 있기 며칠 전, 조여정은 <인간중독>의 숙진 역할로 ‘올해의 조연상’을 두 개나 받았다. 축하할 일도, 덩달아 묻고 싶은 일도 많았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조여정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톱과 코르셋, 스커트 모두 노케제이.
촬영이 곧 시작된다.
딱 일주일 전이다. 이 시간이 가장 두렵고 막막할 때다. 촬영장 가서 부딪쳐봐야 드라마가 시작이 되는구나, 이 인물은 이런 사람이구나 감이 온다. 그 전까지는 약간 허우적대는 시간이다.
똑 부러지는 커리어우먼 캐릭터가 아닐까 예상한다.
마음의 빚을 지고 성공한 여자라서 사람들을 처키처럼 괴롭히면서 일을 밀어붙이는 이혼 변호사다. 스타일리스트가 드라마에 입을 옷을 굉장히 매니시한 정장으로 제작해주었다. 의상 가봉을 하면서 거울을 보니 ‘아, 이런 여자겠구나’ 감이 오더라.
남자들 사이에서 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고군분투하는 성공한 변호사 느낌이다.
1부 와 2부 사이에 반전이 있다. 반전을 돕는 역할은 연우진 씨가 하나. 그렇다. 한때 부하직원이었던 연우진 씨가 직속 상사로 오게 된다. 드라마에서 내가 연우진 씨를 보고 ‘서당개’ 라고 표현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때 내 밑에서 풍월을 읊던 애인데, 어떻게 얘 밑에서 내가 일을 하냐며 굴욕적인 일이 벌어지고 옥신각신한다.
연우진과는 첫 호흡이다.
인상이 굉장히 좋았다. 이 선한 친구가 어떻게 연기를 할까 궁금했다. 그래서 리딩을 한 번 했는데 리딩이라는 게 옆으로 앉아서 서로 눈을 보지 않으면서 대사를 하니까 답답한 마음이 들더라. 리딩을 가볍게 하고 나니 더 궁금해졌다. 이 친구와 호흡이 어떨까, 톰과 제리처럼 보이고 싶은데 이 친구와 하면 어떤 느낌이 날까, 그런 것들이.
<해운대 연인들> 이후 3년 만의 드라마 복귀다.
드라마를 끝낸 지 벌써 3년이나 됐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영화는 대본이 나온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간다. 마음의 그래프를 그려놓고 스케줄표를 보면서 신에 따라 감정 배분과 페이스 조절을 한다. 그런데 드라마는 1, 2부 찍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 방송이랑 촬영이 같이 간다. 워낙 시간이 촉박하게 흐르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민할 시간이 부족하니 그만큼 배우는 현장에서 더 각성을 해야 한다. 파트너와 맞춰볼 시간이 덜한 만큼, 더 잘해야 한다. 그래서 현장에서 더 촉을 세우게 되고, 전체적으로 예민해진다.
하나의 이미지에 만족하지 않는 것 같다.
섹시한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싶으니 이젠 <워킹걸>로 대놓고 코미디를 한다. 내가 딱 원하던 바다. 물론 그런 반응을 의도한 건 절대 아니지만. 매번 작품을 고를 때 염두에 두는 것이 ‘지난번 작품과는 뭐가 다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다. 다른 걸 하고 싶어하는 것이 내 본능인 것 같다. 이럴 때도 있다. 너무 딥한 작품을 하고 나면 다음엔 조금 더 라이트한 작품을, 라이트한 걸 하고 나면 약간 딥하고 무거운 작품이 하고 싶다.
작품이 일인 동시에 힐링이 되는 건가.
그렇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표현해낼 수 있는 최적화된 정서일 때, 혹은 뛰어들어보고 싶은 캐릭터일 때, 그게 내 작품이 되는 것 같다. 이런 행보들을 ‘안주하지 않는다’고 봐주면 너무 기분이 좋다. 난 아직도 내 안에서 뭔가를 더 꺼낼 수 있지 않을까,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없이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 하나를 봐도 영감을 받을수 있는 상태이고 싶다. 선입견 때문에 닫아두거나 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하나씩 열면서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일깨우고 싶다. 배우의 일은 곧영혼의 탐구다.
한계를 실험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듯 보인다.
좋아한다. 그렇다고 잘해낼 것 같다는 확신은 항상 없다. 확신이 들어서 작품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를 즐긴다. 배우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다양하게 나를 시험해볼 수 있었겠나. 물론 힘들 때도 많고, 내 직업이 참 쉽지 않다는 것도 느낀다. 그런데 한계를 시험하는 순간들이 있어 이 일이 계속 재미있다. <워킹 걸>에서도 내가 ‘보희’의 가면을 쓰지 않았으면, 그렇게까지 다 내려놓고 끝까지 가볼 수 있었을까? 그게 배우에겐 가면의 힘이다. 그래서 좋다.
조여정이 코미디를 하게 될 줄 알았나.
상상도 못했다. 어마어마한 도전이었다.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에서는 엄청 까부는 캐릭터였는데, 그 느낌이랑은 또 달랐다. 확실히 다른 스타일의 코미디를 보여줘야 했다. 꽉 짜인 틀 안에서 ‘빵’하고 웃음을 터뜨려줘야 한다. 장면 하나로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웃으려면, 우리는 굉장히 철저히 준비한다. <로필>의 인영은 내가 그 캐릭터 안에서 자연스럽게 놀 수 있었지만, <워킹걸>의 보희는 이전에 내가 꺼내보지 않은 모습이었다.
보통 희극이 제일 어렵다고들 한다.
사람 웃기는 일이 제일 어렵다. 1, 2초 타이밍에 따라 웃기는 포인트를 잡는 게 달라진다. 웃기려고 의도하지 않고 진심으로 연기하면서 관객을 웃겨야 한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하고 나니 무사히 잘 끝마쳤다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이 컸다. 새로운 장르에 발 도장을 찍었으니까.
모자는 두에필로, 톱과 스커트는 제인 송, 힐은 지니 킴.
가면을 벗고 나면 성취감도 들지만 때론 허무할 것 같다.
촬영이 끝나면 나는 아직도 전력질주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줄을 탁 놓아버린 듯한 느낌이다. 서로 막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가 저쪽에서 ‘안녕, 난 끝났어’ 이렇게 말하고 가버리는 느낌? 그러면 내가 진짜 뒤로 발라당 넘어지는 것 같다(웃음). 나는 마지막까지 줄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으니까. 항상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마지막 화장을 지울 때, ‘엄마야’ 외치면서 뒤로 발라당 눕는 기분이다. 대자로 누워서 다시 일어나야 되나 말아야 하나 그런 ‘뻥’한 느낌 말이다.
그 ‘뻥’한 상태일 땐 뭘 하나.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멍때린다.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기 때문에, 한 며칠은 그 상태로 가만히 있는다. 작업했던 사람들하고 만나 커피도 마시고 논다. 그 후에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다. 그 시간을 짧게 해야 내 일상을 보내면서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시간이 오니까. 쉬다가 ‘어? 나 또 뭐 하고 싶어’ 이럴 때가 온다. 항상 일주일을 못 넘긴다. 진짜 못 살겠다.
워커홀릭이다.
아니다. 워커홀릭은 아닌데, 한 이틀 멍하고 또 이틀 지인들하고 수다 떨고, 또 며칠 여행을 갔다 오거나 책, 영화를 보고 있으면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진다. 책을 읽어도 그 속의 여자 주인공이 이미 ‘나’다. 아, 이 역할은 너무 매력 있다거나 저런 캐릭터는 정말 좋구나 하면서 나도 뭔가를 하고 싶다. 내가 생각해도 참 웃기다. 어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인간중독>으로 조연 상을 받았다. 영화평론가, 기자들이 주는 상이라서 더 놀랐다. 배우를 하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배우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지인들의 응원과는 다르게, 기자나 평론가와 같은 전문가들이 응원을 해준다는 느낌은 배우에게 정말 힘이 된다. 수상 소감을 얘기하긴 했는데 다 전달되었을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인간중독>의 ‘숙진’은 관객, 평론가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캐릭터였다.
사실 작업할 때는 그 캐릭터가 얼마나 영향을 끼치게 될지 모른다. 그냥 우리끼리 재미있게 작업을 하는 건데, 어떤 캐릭터가 유독 사랑을 받는 걸 보면 매번 신기하다. 배우라는 직업이 묘한 것 같다. 친절한 듯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캐릭터다. 그렇다. 친절해 보이는 건 숙진의 몸에 밴 형식과도 같은 거다. 그 안은 욕망 덩어리다. 그리고 남의 말을 안 듣는 여자다.
언젠가 ‘불친절한 여자’를 연기하고 싶다고 했다.
‘불친절한 여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단어다. 사실 <방자전> <후궁>도 불친절한 여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캐릭터들이다. 겉으로 웃는다고 친절한 게 아니지 않나. 특히 <후궁>의 ‘화연’은 내가 살아 남아야 하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친절할 수 없었다. 내가 그런 캐릭터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방자전>도 마찬가지로 신분 상승의 욕구가 있는 발칙한 소녀였다. 사람 누구나 가진 이면의 욕망들이 묘하게 잘 그려진 영화다.
‘불친절한 여자’ 말고 다른 여자 연기는 어떤가.
이전과는 다른 장르에서, 또 다른 불친절한 여자를 표현해보고 싶다. 늘 원하는 캐릭터다. 나의 외모가 주는 이미지와 충돌하는, 그런 느낌을 좋아한다. 물론 <워킹걸>이나 이제 들어가는 <이혼 변호사는 연애 중>의 캐릭터들 역시 나한테 꼭 맞는 옷처럼 해내고 싶다.
배우로 살면서 가장 좋은 순간은 언제인가.
음… 캐릭터를 하나 하고 나면, 다음 작품 할 때까지 시간이 흐르면서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물론 단점도 많이 보이지만,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지 고민한다. 배우를 하고 역할을 맡기 때문에 다른 사람 입장에 서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고리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것 같다. 배우라서 참 좋다.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를 고민하나.
사실은 배우이기 전에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가 화두인 것 같다. 그 안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배우이고, 그 나머지는 여자로서의 삶이 있다. 그 안에는 결혼 문제, 가족 문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등등이 있을 거다. 그러나 그 중심엔 배우라는 직업이 있다. 배우라는 사람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배우 사람’이 될 것인지 고민한다.
스트라이프 드레스는 폴앤앨리스.
지금 내린 답은 뭘까.
그냥 이렇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도 내가 일을 할 수 있다면 작품을 통해서 만나건, 오늘처럼 촬영으로 만나게 되는 사이건 나라는 사람과 보낸 시간이 즐거우면 좋겠다. 누군가가 나와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고 ‘조여정과 보낸 시간은 참 좋았어’라고 느낄 수 있으면 한다. 그런 사람=이고 싶고, 그렇게 되기 위해 순간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갈 때 나한테도 그 시간들이 의미가 있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전달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하루하루 충실한 것, 그게 제일 좋다.
한 쪽에 충실하고 나면 희생하는 부분도 생긴다.
그래도 난 아직 솔로니까. 사실 작품을 하는 동안은 세상과의 단절이다. 다행히 난 솔로라서 그 부분에 대한 책임감, 죄책감 같은 것들을 느껴야 하는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은 참 다행이다. 재미있게, 충실히 일을 하면서 지내고 싶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일 수 있지만, 지금은 나를 위한 시간이다.
그 시간을 쪼개서 데이트를 하는 예능에도 출연했다.
하하하. 그 프로그램 제안이 들어왔을 때 너무 좋았던 게, 너무 가보고 싶은 나라가 이탈리아였기 때문에 그 나라를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그게 딱 일주일이지 않나.
일주일 동안 내가 혼자서 여행을 갔으면 보지 못할 곳들을 쭉 훑고 오니까. 스케줄이 타이트하기도 하고 정신없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좋았다.
다녀온 후 연애관이 바뀌진 않았나.
그런 건 없었다. 좋은 풍경들을 보는 순간 ‘나 또 어떤 작품 하지?’ 머릿속으로 떠올랐던 것 같다.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랬다. ‘영화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 작품이 너무 하고 싶네’ 이런 생각을 했다.
마지막 연애는 언제였나.
요새 ‘썸’이라는 단어가 생겼는데, 난 그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애매할 때는 그쪽으로 변명을 하는데… 그냥 데이트를 하는 상대는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연애에 올인하기엔 자격이 없거나 부족한 여자가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 20대 내내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는데 그만큼 기회를 만날 수 없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다. 그래서 지금은 일이 먼저가 됐다. 이기적으로 얘기하자면 이게 더 재미있다. ‘일과 연애 중이에요’라고 말하면 너무 진부하게 들리지 않나. 그런데 진짜 그게 정답이고 진심일 때가 있더라. 남이 말하면 상투적이고 진부한데, 내가 진짜 딱 그 심정일 때 있지 않나.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뭔가.
그저께 영화감독 팀 버튼이 쓴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을 읽었다. 팀 버튼이 쓰고 그린 짧은 동화다. 내용이 굉장히 철학적이고, 그 안에 인생이 다 담겨 있다. 20대에 읽어서 몰랐던 부분들을 지금 다시 읽으면서 느끼는 중이다.
일본 여행도 다녀왔다.
3박 4일 갔다 왔다. 그냥 먹고 걸으러 간 여행이다. 너무 먹는다고 할까봐 그 곳에서 먹은 어마어마한 음식 사진들을 SNS에 다 올리진 못했다. 여행은 언제 해도 좋다.
지금의 조여정이 얼마나 마음에 드나.
나? 음… 본인 성에 차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마음에 안드는 순간들은 너무 많다. 한 번 지나고 나면 절대 안 올 순간들이기 때문에, 노력한다. 상황 안에서 불평이 많아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늘 조심한다. 불평이라는 건 한도 끝도 없고, 그게 곧 습관이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참 좋긴 한데,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에 더 불평이 많아지고 스스로한테든 누구한테든 지적하거나 질책이 많아질 수 있다. 그건 결코 행복한 게 아니다. 연기에 대해 점점 알아가니까 어느 순간 영화를 보면 그걸 즐기지 못하고,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에 괴로운 부분들이 있었다. 스스로 피곤해지는 거다. 그럴 때는 최대한 심플해지려고 노력한다. ‘Be Simple’ 이 말은 죽을 때까지 나의 화두가되는 말이다. 현재의 나도 심플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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