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지창욱

지창욱은 ‘그냥’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가 발음하는 ‘그냥’에는 해답 없는 갈등으로 인생을 소비하지 않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서글서글한 선선함 같은 게 있었다. 거창한 수식이나 포장 없이, 그것이 그냥 지창욱인가 생각했다.
BY | 2016.02.18
가죽 재킷은 C.P. 컴퍼니, 데님 트럭커 재킷은 이스트쿤스트, 피케 셔츠와 바지는 모두 하이드로겐.
지창욱은 낯을 좀 가렸다. 굳이 분류하자면 낯을 가려서 상대를 깍듯하게 대하는 쪽이었다. 출근 시간대 교통체증을 뚫고 시작된 촬영은 해가 지고 아까 출근한 그 사람들이 대부분 퇴근했을 것 같은 시각에야 끝이 났다. 서울 곳곳의 로케이션에서 촬영을 하며 하루 종일 함께 있었지만,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자꾸만 말을 거는 낯선 여자가 드디어 조금 편해진 기색이 지창욱의 얼굴에 떠오른 건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단정하고 예의 바른 배우의 표정 위로 29살 청년의 가식 없는 장난기가 쾌활하게 포개졌다. 배우들은 보통 극 중 캐릭터의 이름으로 알려진다. 인상적인 작품에 출연한 많은 신인 배우들이 그런 식으로 시청자와 관객들에게 기억된다. 그리고 그의 존재감이 한 단계 뛰어오르는 건 더 이상 극 중 캐릭터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무슨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부터다. <웃어라 동해야> 이후 지창욱은 한동안 대한민국의 모든 아주머니들에게 ‘동해’로 불렸지만, 드라마 <기황후>를 기점으로 지창욱이라는 이름이 극 중 이름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힐러>의 지창욱’은 이제 범아시아적으로 유명한 이름이 됐다. 얼마 전 패션 브랜드 던힐의 초청으로 방문한 홍콩에서는 공항과 그가 묵는 호텔 앞에 홍콩 팬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건 서울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창욱이 가는 곳마다 상기된 얼굴의 여자들이 모여들고 주변을 달리던 자동차들도 슬그머니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에 무척 태연했다. 다음 촬영 장소로 이동할 때마다 동네 친구와 맥주 한잔하러 나온 듯한 표정으로 서울의 주택가를 기분 좋게 걸어 다녔다. “원래 잘 돌아다녀요.” 그가 웃었다. 점심식사로 멕시칸 음식점에서 테이크아웃한 부리토를 먹으면서 “저 이거 오늘 처음 먹는데, 되게 맛있네요” 했다. “얼마 전에 어린 스태프 하나가 창욱 씨 어머님이 해주신 밥을 먹다가 울었어요.”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귀띔했다.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을 그가 집으로 초대한 날이었다. “아… 엄마가 생선살을 손으로 발라서 그 친구 밥에 올려주셨는데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랬나봐요.” 지창욱이 또 웃었다. 이태원의 한 펍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남산을 지나 성수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끝이 났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인터뷰는 대화라기보다 관찰의 결과에 가깝다. 데뷔 8년차 배우이자 29살 남자. 성실한 직업인. 낯은 좀 가리지만 다정한, 그럼에도 매사가 자연스러운 사람. 그냥, 지창욱.
트랙 톱은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피케 셔츠는 클럽 모나코, 청바지는 뮌, 니트 캡은 블랭코브×모스 그린 by 슬로우 스테디 클럽, 목걸이는 코디시아르, 라이터는 S.T. 듀퐁.
<힐러>를 끝내고 좀 쉬었나? 그랬다. 쉬면서 인터뷰도 하고, 화보도 찍고…. 인터뷰를 좋아하는 편인가?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싫어하는 편도 아니다.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 리포터가 당신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여자들을 설레게 하는 어깨깡 패”라며 줄자로 당신의 어깨 넓이를 재고 있었다. 아, 기억난다(웃음). 그 인터뷰에서 당신은 시종일관 아주 친절했지만 내 내 ‘아, 약간 민망한데…’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하하, 내가 낯을 가린다. 그게 풀어지기까지 시 간이 좀 걸린다. 그런데 인터뷰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한다. 그게 막 편하진 않다. 그래도 데뷔 초보다는 많이 나아진 거다. 언젠가 “트렌디 드라마로 벼락스타가 되는 게 꿈이었 다”고 시원스럽게 말한 당신의 인터뷰를 읽고 속으로 좀 감탄한 적이 있다. 한동안 인터뷰만 하면 “일일드라마부터 주말드 라마까지 차근차근 해왔는데 혹시 의도한 것이냐’라는 질문을 받곤 했다. 사실 의도 같은 건 없었다. 데뷔하고 처음엔 그냥 하면 다 될 것 같았고, 드라마에서 주연 한 번 맡으면 확 스타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결국 하다보니 이렇게 된 거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 다. 뭐, 사실이기도 했고(웃음). “스타보다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같은 말을 정색하 고 하지 않아서 신선했달까. 그런 말은 낯부끄러워서 못 한다(웃음). 하지만 당신은 이미 스타다. 얼마 전 홍콩에서도 현지 팬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들었다. ‘이분들이 나를 어떻게 알지?’ 싶었다. 알고 보니 <힐러>를 거기서도 벌써 다 봤다고 한다. 요즘은 방송 중인 드라마라도 외국에서 거의 실시간으로 보는 모양이다. 어딜 가나 쏟아지는 관심과 시선이 부담스럽진 않나? 크게 신경 안 쓴다. 내가 하는 일에 방해만 받지 않으면 된다. 내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려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커피를 못 마시게 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웃음). 그냥 나를 좀 쳐다보거나 핸드폰으로 조용히 사진을 찍거나 하는 건 딱히 방해가 안 돼서 괜찮다. 남의 평가에도 초연한 편인가? 초연하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신경 쓰면 내가 너무 힘들어지니까. 어쩌면 내가 편해지려고 무심한 성격으로 천천히 진화한 걸 수도 있다(웃음). 유명해지면 변한다고들 한다. 당신은 어떤가? 별로. 만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거의 똑같다.
트랙 톱과 트랙 팬츠는 모두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by 제레미 스캇, 농구화는 패트릭 유잉, 피케 셔츠는 클럽 모나코, 목걸이는 코디시아르, 모자는 뉴에라.
바쁘지 않을 땐 뭘 하는지 궁금하다. 친구들 만나서 커피 마시거나 술 마신다. 같이 게임도 하는데 주로 위닝(온라인 축구게임)을 한다. 아, 축구를 좋아해서 직접 하기도 한다. 연예인축구팀과 친구들과 같이 하는 팀이 있다. 내 또래 남자들이랑 별로 다를 게 없다. 좀 다르길 기대하며 한 질문이었다. 사람들은 연예인이 자기와 굉장히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안타깝지만 별로 안 다르다(웃음). <힐러>의 ‘서정후’는 이성애자 여자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아, 그런가? 이유가 뭐지? 일단 외모가 아름답다. 그리고 여자가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난다. 가장 중요하게는, 무슨 일 이 있어도 전화를 꼭 받는다! 심지어 악당과 격투를 하면서도 애인의 전화를 받는 남자가 어디 흔한 줄 아나. 하하하하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싸우면서 전화 받는 그 장면은 정말 연기하기 어려웠다. 액션합(合)을 외워야 하고 액션 사이사이 대사도 해야하는데, 시간이 촉박하니 현장에서 빨리빨리 해내야 했다. 굉장히 정신없고 힘들었던 장면이다. 현실의 지창욱은 연애할 때 어떤 남자인가? 나는 정후만큼 섬세하진 않다. 그렇다고 너무 차갑거나 나쁜 남자는 아니다. 그냥 웬만하면 여자에게 맞춰주는 편이다. 극 중 채영신과의 ‘케미’가 무척 좋았던 것만큼이나 당신이 연기한 두 캐릭터인 서정후와 박봉수의 ‘케미’도 좋았다. 특히 <힐러> 팬들 사이에서 최고로 꼽히는 것은 5화 엔딩신이다. “선배 살려주세요” 하며 기침을 하던 봉수가 영신의 손을 잡고 뛰어나가면서 의뭉스럽게 씩 웃는 장면. 아… (웃음) 그 장면도 무척 힘들었다. 원래 “선배 살려주세요” 옆에 붙은 지문은 ‘영신의 손을 잡고 뛴다’와 ‘정후는 영신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였다. 웃긴 웃는데, 왜 웃는가가 적혀 있는 거다. 그 상황에서 영신이가 손을 잡아서도 아니고, 설레거나 신나서도 아니고, 영신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기 때문에 웃는 것이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연기하지…(웃음) 읽을 때는 정말 소설처럼 재미 있는 대본인데, 그걸 연기로 표현하려니 고민스 러웠다. 그래서 그 장면을 엄청 여러 번 찍었다. 원래 송지나 작가가 지문을 문학적으로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배우 입장에서는 머리 아플 수도 있겠다.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재미있고, 너무 어려운데, 그래서 고민스러웠고, 그렇기 때문에 또 재미있었다. 대본이 어려운 건 배우에겐 일종의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대본이 너무 쉬우면 연기하는 입장에선 지루할 수도 있다. 그렇게 고민할 거리를주셨다는 건 작가님께 감사하는 대목이다.
20회를 통틀어 연기로 표현하기 가장 고민스러웠던 장면은 무엇이었나? 서정후란 인물은 안 운다. 아버지 같은 ‘사부’가 죽었을 때도 안 울었다. 눈물을 참아서가 아니라 우는 방법을 몰라서다. 어떤 느낌이냐 하면, ‘안울어지는’ 거다. 그랬던 남자가 채영신이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이 터져 나온다. 즉, 우는 방법을 알게 되는 거다. 그게 정말 어려웠다. 작가님께 “우는 방법을 모르는 남자는 어떻게 표현해야 해요?”라고 여쭤봤더니 “응, 너무 어렵지? 그런데 네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썼어…”라고 하셨다(박장대소). 다정하지만 부담감이 밀려오는 말이다. 작가님이 나를 믿어주신 것도 있다. “그걸 왜 못 해?”가 아니라 “어려운 건 아는데 너는 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말이 되게 감사하고 힘이 됐다. 그런 고민 덕분인지 정후의 감정선이 굉장히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었다. 긴 장면이든 짧은 장면이든 그 안의 흐름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나도 지루한 걸 싫어해서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많이 고민했다. 이건 영화가 아니라 20부작 드라마다. 2시간이 아니라 20시간짜리다. 그 20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매번 고민했다.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이 화를 내도 그리 단조롭지 않겠지만, 드라마는 다르다. 20시간 내내 내가 화만 내면 시청자들이 얼마나 지루하겠나. 대본이 입체적으로 나와줘서 도움이 많이 됐다.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 좋은 배우다. 체형도 파이터보다는 댄서에 가까운 느낌이다. 혹시 춤을 잘 추나? 정말, 저엉말 못 춘다(웃음). 뮤지컬 <그날들>에서 안무보다는 율동에 가까운 춤을 추는 대목이있다. 공연을 본 지인들은 하나같이 “노래도 참좋고 재미있게 보긴 했는데… 제발 춤은 추지 마” 라고 소감을 말했다. 난 정말 열심히 했는데 다들 춤을 추지 말래. 근데 어떡하나, 대본에 있는걸. 개의치 않고 그냥 춘다(폭소). 과연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러면 인터넷 게시판이나 ‘드라마갤’ 같은 데 들어가보지도 않나? 이게 참 사람이 희한한 게… 궁금하다. 그래서 가끔 본다. 대신 칭찬이 있든 안 좋은 말이 있든 크게 연연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멍뭉미’라는 말도 들어본 적 없겠다. 멍뭉미? 그게 뭔가?
수트와 셔츠는 권오수 클래식, 타이와 포켓치프는 꼬르넬리아니, 구두는 로크, 안경은 장 마릴, 우산은 쉘부르의 우산.
요즘 인터넷에서 여자들이 많이 쓰는 말이다. 키가 크 고 어깨도 넓은 건장한 남자인데 묘하게 애처롭고 쓰다듬어주고 싶은 매력이 있다는 뜻이다. 유사 표현으로 ‘대형견미’가 있다. 으하하하! 몰랐다. 오늘 처음 들었다. 되게 좋은말인데? <힐러>에 출연하면서 당신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멍뭉미’의 대명사가 되었다. 듣고 보니 그게 정후가 가지고 있는 매력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물론 배우의 매력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인물을 연기하느냐에 따라 배우는 많이 달라지니까. 방금 차에 타면서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늘 거기 앉나? 그렇다. 조수석을 좋아해서 늘 여기만 앉는다. 조수석만 고집하는 남자는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 남동생 이후 처음 본다. 매니저와 친구 사이다. 17살 때 처음 만났고 지금까지 제일 친한 친구다. 그냥, 둘이 늘 같이 다니는데 친구는 운전을 하니까 내가 조수석에 앉으면 얘기하기도 편하고 좋다. 오늘 아침에 “마음만 먹으면 일주일에 6kg도 찌울 수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먹는 걸 너무 좋아한다. 원래 하루에 6끼씩 먹는 다. 어제도 스케줄이 자정쯤 끝났는데 너무 배가 고팠다. 평상시라면 주저하지 않고 뭘 시켜 먹든 나가서 먹든 무조건 먹었을 텐데, 오늘 화보를 위해 참았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살이 좀 쪄있었다(웃음). 잘 찌고 잘 빠지는 편인가? 그런 편이다. 진짜 일주일에 5kg 찐 적도 있다.
피케 셔츠는 프레드 페리, 스웨트 팬츠는 하이드로겐, 스니커즈는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최근까지 <그날들> 공연을 했다. 뮤지컬에는 원래 관심이 있었나? 학교 밖에서 처음으로 한 연기가 독립영화였고, 그다음이 대학로 소극장에 올렸던 뮤지컬이었다. 오디션을 봐서 하게 됐다. 정식 공연이 아니어서 공연 기간도 열흘 정도로 짧았다. 뮤지컬은어렸을 때부터 쭉 하고 싶어했던 장르다. 이유가 뭘까? 무대에서 연기하는 걸 좋아하는데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까지 있으니까. 그런데 춤은…. 춤은 뭐…(웃음) 잘 못 하는데 그냥 열심히 연습하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연습하는데 안 되는 게 어딨어, 하는 마음이랄까. 내년쯤 군대에 간다고 들었다. 그렇다. 정확한 시기는 아직 잘 모르겠다. 입대를 앞두고 있다는 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부담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부담은 되는데,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그냥 ‘뭐 어차피 가야 하는 거, 갔다 오면 되지’ 싶다. 물론 아쉽기는하다. 하지만 생각을 해보니까 군대는 내년에 가도 아쉽고, 10년 뒤에 가도 아쉬울 거다. 그래도 갔다 오면 여러모로 더 좋아지지 않을까. 그래서 걱정 안 한다.
후드 집업 스웨트 셔츠와 스웨트 팬츠는 모두 프랭클린 마샬.
오늘 종일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당신이 하는 말에는 하나의 일관적인 흐름이 있다. 오, 그게 뭘까?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는다.” 맞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엔 너무 머리가 아프다.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면 내 일상에 관련해선 아무것도 생각을 안 하고 산다. 심지어 세금이나 관리비 같은 것도 몇 개월씩 밀렸다가 내고 그런다. 그런 걸 전혀 못 챙긴다. 이번 <힐러> 때도 그랬다. 끝나고 집에 돌아왔더니 밀려 있는 고지서가…(웃음) 그것부터 재빨리 정리를 했다. 그렇게 산다. 내가 두 가지를 동시에 잘 못 한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아주 중요한 결정을 명쾌하게하곤 한다. 장기적으로는 더 좋은 성격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너무 정신을 놓고 사니까 현실로 돌아왔을 때 많이 혼란스럽다(웃음). 작품 할 때는 작품 고민만 하면 되는데, 작품이 끝나면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진다. 드라마 촬영하면 아무 고민 없이 그 판타지 안에서 사는 거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작품 들어가면 애인에게도 신경을 잘 못 쓸 것 같다. 맞다. 신경을 못 쓴다. 그래서 여자를 못 만난다. 그리고 내가 워낙 현장에서 핸드폰을 쥐고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웬만하면 핸드폰을 잘 안 본다. 그러니까 연락을 잘 못 한다. 여자친구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친구, 가족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그래서 늘 미안하고, 내가 작품 끝날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두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고맙다. 심지어 촬영을 한참 하다보면 같이 사는 엄마도 제대로 못 본다(웃음).
수트와 타이, 만년필은 모두 S.T. 듀퐁, 셔츠는 꼬르넬리아니, 안경은 장 마릴, 반지는 코디시아르, 서스펜더는 리베라노&리베라노 by 비앤테일러, 브리프 케이스는 몬테바르끼.
오랜 친구들은 이미 이런 패턴에 익숙해진 상태겠다. 그렇다. “어서 끝내고 돌아와, 빨리 끝내고 같이 놀자” 그런다. 설령 당신이 지금 연애를 하고 있다 한들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진 않겠지? 그렇다. 우문이지만 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 있다.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나? 외모로 말할 수 있는 이상형은 딱히 없다. 그냥 나랑 잘 맞으면 된다. 얘기를 나누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외모만 보고 누굴 만나기엔, 잘 안 맞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억지로 맞추는 과정 자체가 곤욕이다. 위닝을 잘하는 여자는 어떨까? 좋지(웃음). 그런데 그런 여자는 못 봤다. 차기작은 군대 가기 전 마지막 작품이 될 가능성이 많겠다. 작품을 선택하는 당신만의 기준이 있나? 철저하게 주관적인 기준이다. 일단 대본이 재미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하려는 역할에 매력이 있어야 한다. 또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느껴져야 한다. 이 세 가지를 가장 많이 고려한다. 남들은 다 좋다는데 나는 영 재미가 없는 작품은 하기 힘들다. 학교에서 하는 공연이라면 공부하듯이 배우면서 하면 되는데, 이건 다르다. 돈 받고 일하는 거면 책임감을 가지고 잘 해내야 한다.
수트와 타이는 몬테바르끼, 셔츠와 슈즈는 브루넬로 쿠치넬리, 안경은 BJ 클래식, 우산은 쉘부르의 우산, 반지는 코디시아르.
요즘의 관심사는 뭔가? 깨어 있는 시간 동안 제일 많이 생각하는 것. 사실 별 생각 안 하고 있다(웃음). 이제 조금 지나면 작품 생각을 하겠지. 작품 말고는 관심사가 없는 건가? 그게 고민이다. 내가 뭘, 어떤 취미를 가져야 잘 쉴 수 있을까. 잡생각 없이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는 특별한 취미를 찾고 싶다. 아직 찾는 중이다. 살면서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정말 포기 못하겠다’ 하는 것 하나만 꼽는다면 뭘까? 먹는 거!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는 행복감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내가 앞으로 한 60년쯤 더 산다고 치면, 죽기 전에 전세계에 있는 맛있는 걸 다 먹을 수 있을까? 다 못 먹을 것 같다. 가끔 매니저 친구랑 그런 얘기도 한다. 야, 이 세상엔 맛있는 게 왜 이렇게 많은 거냐! 아직도 한국엔 내가 못 먹어본 맛있는 게 너무 많 은데, 맛집은 또 왜 이렇게 많은 거야…(웃음). 심지어 엄마가 요리를 잘하신다. 지금 29년째 한 사람이 만든 음식만 주야장천 먹고 있는데 난 그게 아직도 너무 맛있다. 그렇다면 요즘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순댓국! 순댓국에 꽂혔다. 순댓국 전에는 한동안 족발이었다(웃음). 당신처럼 먹는 얘기를 열정적으로 하는 남자배우는 처음 봤다. 좋아하는 사람들 만나고, 같이 맛있는 걸 나눠 먹고… 그런 게 좋다. 삶 앞에서 그렇게 거창해지고 싶지 않다. 결국엔 더 맛있는 걸 먹자고 다들 열심히 사는 거 아니겠나(웃음). 나는 그냥, 행복하게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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