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회에서 만난 그 오빠

서른 넘은 여자에겐 소개팅도 확률 낮은 도박이고 매일매일 신나게 놀아줄 친구도 없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에겐 30대 연애의 장, 동호회가 있다. 동호회야말로 물찬 남자들이 우글대는 황금어장이다. 흑심이 바짝 올라 동호회를 전전한 서른세 살 M양의 동호회 오빠♡들을 만나보시라.
BY | 2016.03.02
난 딱 평균이다. 모자람 없이 잘 살아왔고 그럭저럭 연애도 몇 번 했다. 서른은 숫자에 불과하다고? 아니다. 서른을 넘어서고부터 몇 가지 현실적인 불편함이 찾아왔다. 매일 밤 놀아주던 친구들이 사라진다. 결혼해서 집에 가거나, 결혼할 남자를 만나러 가기 때문이다. 스물아홉 살까지만 해도 빠꼼대던 남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연락을 끊기 시작한다. 혼자가 된다. 집에 갈 건데, 칼퇴는 해서 뭐하나. 본의 아니게 회사에 늘어붙어 야근을 해대기 시작한 덕분에 고과가 좋아졌다. 소개팅은 떨어진 몸값을 확인하는 자리일 뿐(난 이제 대머리, 무능력자, 술쓰레기나 만나라는 거야?), 더 이상 희망은 없다. 떠밀리듯 혼자 놀기 시작하는 나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 노는 게 참으로 편하다는 걸 알게 된다. 서른셋, 이제는 혼자 식당에 들어가 제일 편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천연덕스럽게 깍두기를 우적우적 씹으며 따로국밥을 흡입할 수 있는 나이다. 보고 싶은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라도, 커플 부대의 눈길 따위 아랑곳 않고 주말의 극장에 혼자 가는 솔로 완전체(현대 도시전설에 등장하는 요괴)가 된다.
어느 수요일 저녁, 더욱 진일보한 요괴력으로 혼자 이자카야 다찌에 앉아 일본산 생맥주와 닭똥집 꼬치를 우물대다가 뻐꾸기 노니는 한줄기 빛을 발견했다. “감자콩 님은 댁이 어디세요?” “흑장미 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전 서른다섯이에요” 하는, 동호회 모임임이 확실한 4:4 남녀였다! ‘오호라. 좀 오글거리긴 해도, 같은 취미를 가진 남자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겠지. 그러다 눈 맞아 결혼을 하면 평생 친구처럼 같이 취미 생활도 즐기고. 동호회 완전 딱 좋네?’라는 단순한 망상이 피어오른다. 마침 뱃살을 부여잡으며 평생의 로망인 테니스 스커트를 입기 위해 테니스 레슨을 듣기 시작한 타이밍이었다. 스마트폰을 신주단지처럼 쥐고 ‘테니스’를 검색! 마침 집 가까운 코트에서 주말마다 아침에 테니스를 치는 동호회를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가식적인 미소를 연습하고 나간 일요일 아침 첫 모임. 운동 동호회라 그런지 여자는 딱 하나 더 있고 남자가 무지! 많다! 신입회원이라고 말 한마디라도 더 걸어주고 뭐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는 이런 분위기. 서른 넘고부터 쭉 느꼈던 뒷방 늙은이의 묵은 설움이 짜릿하게 날아갔다. 왕년의 귀족 스포츠답게 테니스 동호회의 남자들은 소개팅에 나오는 ‘놈’들보다 회사도 멀쩡하고 여러모로 번듯했다. 게다가 테니스를 잘 칠수록 멋있어 보였다. 그중 S오빠♡는 회사가 가까웠고, 나보다 연봉이 높은 회사였고, 성격은 무난했으며 생김새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제 망상을 현실로 바꾸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만. 엥, 두 달이 지났는데 자연스럽게 친해진 남자는 몇 있지만 그걸로 끝이다. 일단 전혀 발전하지 않는 나의 실력이 문제. 찍어둔 S오빠♡는 벌써 5년도 넘게 테니스를 친 사람이라 내 상대를 해줄 급이 안 됐다. 랠리라도 할 수 있어야 말이라도 섞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다들 테니스가 끝나면 결혼식이니, 빨래니 하는 핑계로 뒤풀이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냉정한 분위기도 문제. 무릇 남녀 관계는 알코올 윤활유를 좀 끼얹어줘야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것 아니던가. 아뿔싸, 포기할 때를 알고 물러났다. ▶ 뒤풀이 없는 동호회는 동호회 아니다. 동호회 가입하기 전에 번개, 정모 관련 게시물을 찾아보고 빈도를 체크할 것!
다음 타깃은 무조건 모임이 많은 곳. 우리 동네를 본거지로 하는, 회원수 100명의 초미니 맛집 동호회를 찾아냈다. 게시판을 보니 번개 빈도는 대형 동호회 못지않다. 나가보니 예상대로 1주일에 네댓 번, 그러니까 허구한 날 노는 분위기. 게다가 사는 동네가 같으니 사는 양상도 비슷할 수밖에 없달까. 어장도 괜찮았다. 몇 번 번개에 나가다 보니 실제 활동하는 20여 명 중 4~5명 정도의 라인이 여러 개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라인마다의 비공식 번개가 꽤 빈번한 눈치였다. 내 타입인 P오빠♡에게 착 달라붙어 라인에 끼려고 했으나 그 라인에 있는 여자들의 견제가 꽤 극심했다. 카카오톡으로 “P오빠♡, 오늘 저녁 때 뭐하세요? 번개 없어요?” 하고 뻐꾸기를 날려봤자 답은 “미안.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어쩌지ㅠㅠ” 하고 돌아왔다. P오빠♡의 라인에서 호시탐탐 P오빠♡를 노리고 있는 여자들이 날 튕겨내는 것이 틀림없다. 구차해지기는 싫다. P오빠♡는 좀 아깝지만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물러나준다! ▶ 너무 작은 동호회는 튕겨져 나온다. 차라리 큰 동호회가 유리하다. 마음 맞는 신입들과 함께 새 라인을 만들면 되기 때문.
서러운 마음에, 진작 가입해서 이따금 눈팅만 하던 자전거 동호회에 나가보기로 했다. 여긴 회원수도 3만 명이나 되고,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라이딩 번개가 매일 올라온다. 동네 맛집 동호회 왕따의 굴욕을 여기서 씻으리라! 사놓기만 하고 거의 방치 상태였던 자전거를 끌고 모임에 나갔다. 지화자~ 자전거 동호회라 그런지 남탕이다. 얼쑤~ 보아하니 자전거들도 기본 100만원 이상에 이따금 300만원, 1000만원짜리 자전거도 등장해주신다. 다들 살기 편하시구나. 아싸. 온몸에 달라붙은 쫄바지와 쫄티 차림의 남자들이 좀 민망하긴 해도 적응이 되자 눈에 흑심이 가득 찬다. 깨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쫄깃해 보이는 힙선이 난무하고, 여름 내내 라이딩하시느라 검게 그을린 피부들도 침 나오도록 섹시하다. 여기도 신입회원에게 친절한 건 기본 매너. 녹슬다 못해 썩어가는 자전거를 끌고 나간 내게 “팔당 가보셨어요? 주말에 번개 칠 건데 같이 가요”라는데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나요. 참 순탄했다. 자전거 동호회 라이딩에 처음 참여한 날부터 눈도장 콱 찍었던, 유독 엉덩이와 허벅지가 쫄깃하던 K오빠♡와 무사히 친해져 카카오톡이 하루에도 몇 번 오가던 나날. 라이딩 끝난 후 새벽까지 이어지는 가벼운(?) 뒤풀이 자리에서 친해진 수많은 오빠♡들과 건장한 동생들. 완벽한 날들이었으나 반전이 있었다. 술도 과했고, K오빠♡와 가까워진 속도도 과속이었다. 평생 오피스 가이들의 물렁살만 더듬다가 K오빠♡의 쫄깃한 육체가 들이대니 나도 모르게 이성을 놓은 것이 실수였다. 섹스야, 지금 생각해도 침이 고일 정도로 세 번 다 끝내줬다(응, 다 그날 밤에). 자전거는 아이돌 같은 잔근육을 발달시키는 운동이다. 1년 내내 자전거 위에서 지낸 짐승남 K오빠♡의 짐승 같은 육체는 나를 한껏 발정난 짐승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결론은 쓴맛. 알고 보면 K오빠♡는 동호회의 몇 되지 않는 여자들이 대부분 한 번씩은 거쳐간, 참으로 저렴한 분이었던 것. 남들이 씹다 버린 껌을 덥석 문 덕분에 동호회 사람들을 보기가 지레 쪽 팔려진 내 자전거는 다시 창고 신세다. ▶ 동호회 모임은 자주 나갈수록 좋다. 확고한 진리다. 동호회 사람과의 성급한 원나잇스탠드는 꽝이다. 이 역시 확고한 진리다.
아무튼 K오빠♡ 덕분에 몸이 달아 전투적으로 다음 남자, 아니 동호회를 찾아댔다. 이번에 가입한 곳은 이른바 묻지마 동호회. ‘직장인 동호회’ ‘30대 동호회’ 등 모임 외엔 아무 목적 없는 동호회다. ‘이런 데 나가서 뭐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다양한 남자들 중 내게 딱 맞는 오빠♡가 나타날 거라는 믿음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회원수가 무려 5만 명에 달하는 이 동호회는 꽤나 전문적(?)인 번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번개에는 인원 제한이 있고, 회비를 선입금 받기도 하며, 가장 놀라웠던 것은 성비를 맞춰 신청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소싯적 다녔던 나이트클럽 못지않게 체계적인 부킹 시스템 아닌가!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긴 하지만, 혼자 이자카야 다찌에서 닭똥집 꼬치 앞에 놓고 청승 떨던 시절을 떠올리면 민망함도 잊혀졌다. 급한 마음에 가장 빨리 있는 번개를 골랐는데 다름 아닌 서울 변두리의 주꾸미 번개. ‘평생 서울에 살면서도 안 가본 데까지 가서 주꾸미나 먹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제는 주꾸미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지역이었다. 이날 나온 이 동네 남자들의 면면이 기절초풍이었다.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의 39세 백수 아저씨, 반짝이는 비즈 장식 넥타이를 메고 나온 38세 경찰… 급기야 “식사를 하고 오셨다고요? 에이, 주꾸미 안 먹어도 무조건 1/n 해서 1만원이에요. 회비 안 깎아주는데 많이 드세요.ㅋㅋ”라는 멘트를 듣는 순간 인내심은 산산이 부서졌다. 회비 1만원, 깎아서 3000원 덜 내면 좋으실까요? 나 자신까지 깎아 내려지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급한 일이 생긴 척, 군말 없이 1만원을 내고 그 끔찍한 번개에서 도망쳤다. ▶ 묻지마 동호회는 혼탁하고 노골적이다. 철저히 계산해서 접근하라. 특히, 번개에서 잘나가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면 잘나가는 동네의 번개로 가라.
두 번 연속 동호회에 데이자 남자고 뭐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는 게 남는 거란 생각으로 와인 동호회에 가입했다. 주로 가로수길이나 이태원에서 번개가 열리고, 회비는 3만~5만원 정도이니 거슬릴 게 없어 보였다. 와우, 그런데 정작 와인 동호회야말로 포기한 순간 찾아낸 황금어장이었다. 여자가 더 많긴 해도, 적은 수의 남자들이 다 소수정예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30대에 와인 마시는 남자쯤 되면 여유도, 취향도 갖추고 있다. 그날 가로수길에서 모인 8명 중 남자는 3명이었고, 두 명은 개원의에 한 명은 건축 설계를 한다고 했다. 디자이너라는 동갑 여자 P와 친해져 야근 많은 대기업이나 금융계 회사에 다니는 남자들도 주말에 나타난다는 정보도 입수할 수 있었다. 결국 지금의 와인 동호회가 종착지다. 와인과 훌륭한 요리, 괜찮은 남자들이 있고, 덤으로 친구도 생겼다. 요즘 부쩍 친해진 프로그래머 H오빠♡와는 서울시향 공연이 있을 때마다 함께 (번개를 쳐서ㅠㅠ) 보러 다닐 정도로 친해졌고, SM7에 실어 집에 데려다 주곤 하지만 아직 손만 잡아봤다. 시행착오도 겪었고, 아직 연애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소개팅도 글러먹은 30대 여자에게 동호회야말로 마지막 남은 연애의 황금어장이다. 폭스바겐 골프 동호회가 그렇게 물이 좋다는데, H오빠♡랑 잘 안 되면 거기도 한번 나가봐? ▶ 1만원짜리 번개에는 1만원짜리 밥만 먹어본 남자들만 나온다. 번개 회비는 싼 게 비지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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