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조연 배우가 사는 법 `오정세, 조은지`
‘감 ’ 연기도 오랫동안 비슷한 캐릭터가 반복 재생되면 지겹기 마련이다. 오정세와 조은지. 주연과 조연. 지극히 관습적인 이분법 안에서 이들은 분명 조연이다. 그러나 존재감은 주연보다 결코 처지지 는다. 다양한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무한성장하고 있는 이들. <라듸오 데이즈>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두 영화가 건진 최고의 보석.
BY | 2016.04.07
오정세, 소심한 남자의 연기 본능
영화를 보면, 촬영장의 분위기가 보인다. 누가 봐도 즐거운 영화에서는 촬영장의 따뜻하고 유쾌한 공기가 느껴지고,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때가 있다. 영화 <라듸오 데이즈>도 그랬다. ‘1930년대 경성방송국에서 조선 최 의 라디오 드라마 <사랑의 불꽃>을 만들면서 벌어지는 생쑈를 그린 영화. 한량 피디와 의욕은 앞서지만 위기 대처 능력 빵점인 성우, 방송 사고 다발 재즈 가수와 푼수 기생, 엔딩을 단 한 번도 완성시켜본 적 없는 작가. 배우들은 마치 실제로 한 ‘팀’이라도 되는 양 영화 안에서 정말 잘 논다. 이 영화 안에서 배우들은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고, 골고루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배우가 있으니, 아나운서 만철과 드라마 <사랑의 불꽃> 주인공 장훈, 그리고 변사까지 1인 3역을 아주 천연덕스럽게 소화한 오정세다. 변사 같기도 하고 북한 아나운서 같기도 한 독특한 억양의 말투는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1930년대 라디오 자료를 구해서 들어봤죠. 실제 들어보면, 아나운서 목소리에 높낮이가 거의 없어요. 이대로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970년대 라디오를 들어보니까, 톤도 많이 올라가고, 이 정도면 감정의 고조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감독님께 건의했어요. 방송국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녹음실을 빌려 친한 배우랑 둘이서 대사 맞춰보고, 녹음해서 내 목소리를 들어보면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어요.”
그는 스크린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배우들처럼 안정감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오정세는 <사춘기> <싸게 사기> 등 수많은 단편영화와, <수취인 불명>, <거울 속으로>, <8월의 일요일들>, <극락도 살인사건> 등의 영화와 <이발사 박봉구>, <라이어> 등의 연극에 출연한 데뷔 8년차 배우이기 때문이다.
오정세의 얼굴은 캐릭터에 따라서 변화의 폭이 크다. 어리어리하고 좌충우돌하는 <라듸오 데이즈>의 만철과, 일터에선 헌책과 씨름하고 집에선 엄마와 소소한 말싸움을 일삼는 평범하고 조금은 권태롭던 <팔월의 일요일들>에서의 헌책방 주인 소국은 과연 그들이 동일 인물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그 갭이 크다. 그래서 오정세 하면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가 없다. 배우에겐 불리할 것도 같다. “처음엔 많이 불리했죠. 단역부터 시작하면 깡패 아니면 경찰인데, 눈에 띄지 으면 조연으로 올라갈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면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배우는 배우 자체의 이미지가 아니라 캐릭터 이미지를 갖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는 조용조용하게 숫기 없이 말하는 A형 남자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냥 주어진 대로 정해진 대로 살아왔다. 그는 왜 배우가 되길 열망했을까. 제작에 들어가지 을 게 뻔한, 혹시 주인공을 맡더라도 응하지 을 오디션을 수 번, 수백 번 본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 때 연극 동아리도 했지만, 이상하게 오디션에 가면 많이 떨었어요. 그런데도 배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무 커서, 반에 4년은 아무 역할도 못하면서 어떤 오디션이든 가리지 고 많이 찾아다녔어요. 처음엔 캐스팅되기 위해서 찾아갔지만, 나중엔 주인공 하라고 해도 안 할 영화인데도 봤어요. 오디션 자체가 편해졌으면 싶었거든요. 처음엔 열 번 중에 아홉 번은 긴장했지만 2, 3년 지나니까 열 번 중에 다섯 번은 편해졌죠.”
오디션 자체는 자신과의 싸움이었을지 모른다. 두려움을 깨는 과정. 그렇게 천천히 자신과의 싸움을 치른 후에, 오정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거울 속으로>에서 형사 역할을 했을 때 주변에서 칭찬도 많이 받았고, 나도 나름대로 만족했는데, 영화가 잘 안 됐어요. 그 이후에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심사위원이 ‘오정세 씨, 연기 처음 하시죠?’라고 묻더라고요. 그때는 기분 나빴는데 지나고 나니, 내가 또 누군가에겐 연기를 처음 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가 있겠구나, 스스로는 성장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멀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라듸오 데이즈>를 찍을 때는, 상대 역의 애드리브까지 생각해줄 정도로 배우들 사이의 팀워크가 좋았어요. 즐겁게 일했고, 나를 많이 보여줄 수 있었던,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작품이죠.” 하지만 그는 이 작품 때문에 자신이 어떤 단계에 올라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인다.
2006년 연극 <이발사 박봉구>를 하면서 무대에서 커튼콜을 할 때, 눈물을 흘리면서 처음으로 ‘행복’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느꼈다. 그 행복감 하나로 평생 연기를 할 결심을 했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준비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연기를 하기 전엔 A와 B라고 생각했는데, 연기하면서 나도 모르게 F라는 감정이 나올 때가 있죠. 그럴 때 기분이 좋아요. 그런 감정들로만 꽉 찬 영화를 한번 해보고 싶어요.”
조은지, 철든 여배우의 독백
조은지. 길을 걷다가 그녀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어깨를 툭 치며 “안녕, 어디 가니?” 이렇게 말을 건넬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겐 그런 친근감이 있다. <파리의 연인>, <달콤살벌한 연인>, <죽어도 해피엔딩>, 그리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까지. 일련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그녀는 세상살이에 지친 주인공에게 ‘그래, 어떻게든 그냥 웃으면서 살아보자’라고 대책없는 혹은 어이없는 희망을 안겨주는 역이다.
그녀는 어떤 영화에서든, 판에 박힌 미인이 아니라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에 ‘ 끼’로 표현될 만한 개성이 시 지를 일으키면서 반짝이는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래서 조은지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 골키퍼 수희 역으로 합류함으로써, 아줌마 군단으로만 이루어진 핸드볼 팀에 리얼리티를 깨지 는 극적 재미가 배가되었다.
“사실 친구들 만나면 그렇지 아요. 영화에서랑 많이 달라요. 나에게 캐릭터에서 보여지는 모습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많이 놀라죠. 내가 생각보다 말도 없고, 표정도 없어서.”
오정세와 함께 촬영하면서 농담도 건네고 애교도 떨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털털하고 터프하진 다. 포즈를 취하면서도 쑥스러워하고(그러면서도 잘한다), 표정을 연기하면서도 살짝 떠는 게 보인다.
“그래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을 찍으면서 많이 대담해졌어요. 그 전에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거나 누가 나에게 다가오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얼마만큼 나를 보여줘야 할지 몰랐어요. 소리 언니, 정은 언니, 지영 언니… 나이의 벽을 깨고 3개월간 합숙 훈련하고 고생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받아주는 것이 어떤 건지 알게 됐어요. 그러고 나니, 사람 대하는 게 아주 많이 편해졌어요.”
<우생순>은 배우 조은지에게, <달콤 살벌한 연인> 이후 두 번째로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라는 것 외에도 많은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임순 감독님 작품은 <와이키키 브라더스>만 봤어요. 감독님이 어떤 정서를 갖고 있고 어떤 색깔을 내려고 했는지는 잘 몰랐지만 재밌게 봤어요. 혹자들은 <우생순>에서 임 감독님이 자기 색깔을 많이 포기했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임순 감독님이라서 가능했던 것? 분명히 있죠. 여자 스포츠 영화라고 하면 상업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줌마들의 투혼을 그리고 있다는 것, 캐릭터 각자가 갖고 있는 아픔을 잘 끌어내고 굉장히 인간적으로 그려냈다는 것, 그건 임 감독님이라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우생순>을 찍기 전, 사실 몸이 힘들 것은 이미 각오를 했다. 촬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신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핸드볼 국가 대표 역할을 맡았다는 것. 그들의 고뇌를 대표적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더 힘들었다. 많은 부분이 각색됐지만 어쨌거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고, 패배가 예정된 게임을 해야 했으니까.
종종 배우들은 어떤 메시지가 강한 영화를 찍은 후엔 변한다. “물론 예전엔 전혀 핸드볼에 대한 관심이 없었어요. 배우는 어떤 소재의 영화를 찍었는지에 따라 그 이후에 관심도가 조금 바뀌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소재가 좋아서 결정했고, 그 다음에는 자료 화면을 보며 연습을 하고, 국가 대표 선수들을 직접 만나면서 많은 것을 느꼈어요. 여자들이 정말 파워 있게 할 수 있는 종목이 많지 은데, 비인기 종목이고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게 마음이 아팠죠. 지금은 이래봬도 핸드볼 홍보대사인걸요. ”
사실, 조은지는 <달콤살벌한 연인>이나 <우생순>에서 보여진 것처럼 철없는 캐릭터로만 나온 것이 아니다. 2000년. 데뷔했던 임상수 감독의 영화 <눈물>이나 <그때 그 사람들>, 특히 김태식 감독의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서의 ‘소옥’ 역은 그동안 보여줬던 거침없고 철없는 여자와는 많이 다르다. 이 영화에서 조은지는 거침없지만, 원숙한 여인의 복잡미묘한 심정을 무나 잘 표현했다.
“예전에는 어떤 캐릭터가 주어졌을 때, 이 캐릭터 안에 들어가야 한다, 는 그 사람이 되야 한다고 말하면 나는 조은지인데 내가 왜 얘가 되어야 돼 하며 입을 삐쭉 내밀었어요. 내가 그 사람을 조은지로 만들겠다 생각했는데 그건 사실 짧은 생각이었어요. 찍고, 또 찍고, 자꾸 찍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내 자신에게 주문을 걸고, 정말 그런 감정이 생기더라고요. 얘는 이랬을 거야, 과거는 이랬을 거야. 그렇다고 캐릭터에서 못 빠져나오는 것까진 아니지만 영화를 찍고 나서, 조금씩 성향이 달라지는 것을 느껴요.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를 찍고 나서는 더 심했죠. 아침 7시에 촬영 시작해서 그 다음 날 7시까지 촬영하고 그러니까, 이후에도 캐릭터가 계속 남아 있더라구요.”
여배우들이 영화 속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나 생명에는 한계가 있다. 관객들이 여배우에게 기대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멜로 영화에는 바비 인형처럼 예쁜 여배우가 나와야 한다거나, 여자 주인공은 예뻐야 한다거나. “주인공이 되어 영화를 이끌고 가는 것에 대한 고민, 당연히 있죠. 하지만 시기상조인 거 같아요. 여기서 내려가고 올라가고는 나에게 중요하지 아요. 그런 것에 대해선 욕심이 없어요. 대중들에게 얼굴이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 순간, 관객들도 인정할 거예요. 나보다 예쁜 배우들은 물론 많아요. 하지만 다양한 소재의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가 계속 나올 거고, 나 같은 배우도 꼭 요하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만한 욕심도 있고요. 하지만 서두르고 싶진 않아요.”
조은지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명민한 배우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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