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석진이라는 함수에 관한 이야기

이 남자,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큰 부침도 좌절도 없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데 재능을 보이던 이 까칠한 공학도는, 이제 종이가 아닌 브라운관과 스크린 안에서 연기라는 꽤 어려운 함수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BY | 2016.04.15
지금 대중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배우 하석진은 드라마 <행복합니다>의 가난한 권투선수 강석이다. 데뷔한 지 4년차. 드라마 6편에 영화 4편, 뮤직비디오에서 단막극까지 연차에 비해 상당한 다작임에도 강석은 그 전에 하석진이 해왔던 모든 것들을 강력한 쓰나미처럼 덮어버렸다. 강석의 한 방은 ‘남자 하석진’의 한 방이기도 했다. 몸에 달라붙는 슬리브리스, 아주 짧게 자른 머리, 그늘진 눈으로 브라운관을 응시하던 그는 운동으로 다져진 몸 좋은 남자에 대한 환상을 그대로 충족시켜줬다. 그뿐인가. 재벌 2세, 싸움짱, 바람둥이 같은 캐릭터에서 그저 흔하디흔한 ‘잘생긴’ 젊은 배우에 불과했던 그는, 어두운 과거를 가진 가질 수 없는 것들(권력,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분노와 고통으로 가득 찬 쓸쓸한 청춘 그 자체였다.
드라마 끝나고 요즘 어떻게 지내요. 일주일에 3~4번은 이렇게 인터뷰하고, 새로 들어가는 작품 보거나 남는 시간엔 친구들 만나요. 영화 <여름, 속삭임>, 어때요. 잘될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사실 영화가 많이 배급이 되어서 메이저 영화관에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만든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요. 그냥 이런 영화도 있구나, 분위기가 좋아서 한 거예요. 아까 매니저에게 들으니 이번 달 말부터 새 작품 시작이라던데요? <청년폭도맹진가>라고. 노브레인 노래 제목에서 따온 거예요. <우린 액션배우다> 만드신 감독님 거고요. 20대 청년 백수 4명이 한심하게 살아가다 공비가 내려와서 얽히고 설키면서 생기는 내용을 다룬, <트레인스포팅> 같은 청춘영화예요. 재밌겠네요. 작품 들어가기 전에 많이 놀아야겠어요. 친구들 만나면 뭐해요? 술 마셔요. 주량은 소주 2~3병 정도. 아니면 플레이스테이션 축구게임 같은 거 해요. 게임 잘해요? 되~게 잘해요.^^ <행복합니다> 이후 아줌마들이 정말 좋아하죠? 완전 신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그 이미지가 참 강해요. 기존 이미지는 다 없어진 느낌이랄까. 다양한 작품을 하게 되는 건 좋아요. 주말 드라마를 통해서 절 아시는 분들의 연령층이 넓어졌다는 건 느껴져요. 개인적으로도 많이 배웠고요. 기존에 하던 것과 전혀 다른 캐릭터예요. 전형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상징적인 캐릭터였어요. 복잡한 내면이 있는 인물이다 보니 이래저래 배운 게 많죠. 호흡이 길어서 이 작품을 통해 타이밍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강석은 계속 도망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잖아요. 진짜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전 못 만날 거 같아요. 뭔가 계산을 해봤다가 답이 안 나오는 건 포기해요.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니까요. 고등학교 때는 잠만 잤다고 하는데 어려움 없이 대학에 진학하고, 데뷔도 제안을 받아 상당히 우아하게 시작했어요. 주변에서 보면 되게 얄미운 캐릭터예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어느 날 보면 그렇게 된 듯한 느낌? 맞아요. 하지만 그 과정을 그냥 패스하는 건 좋은 게 아닌 것 같아요. 그걸 통해 뭔가를 다듬고 만들어가면서 올라갔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된 상태에서 해야 하니까 힘들더라고요. 학교에서는 기초가 확실하게 쌓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따라가려니 힘들었고. 데뷔하고 나서도 작품을 할 때마다 압박이 심했어요. 지금 내 수준에서 이 작품을 하려면 더 많은 경험을 쌓은 상태여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신인치고 다들 비중 있는 캐릭터라 항상 부담이 심했어요. 사람들이 흔히 공대생(하석진은 한양대 기계공학과 00학번이다)에 대한 선입견이 있죠. 본인은 어때요? 약간 그런 게 있어요. 흔히 ‘공대 또라이’라고 하죠. 가령 연애할 때도 수치로 표현을 하는 편이에요. 수치로요? 10점 만점에 10점.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게 8이라 치면 요즘은 4가 된 것 같다. 나머지 4는 어디 갔니? 이런 식으로요. 하하, 정말요? 심지어 처음에 10점도 아니네. 그런 게 저도 모르게 나와버려요. 도형과 수식과 그래프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랄까. 감성적이기보다는 논리적이죠. 연기자로서는 좀 그래요. 만약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캐릭터가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럴 땐 최대한 억지로라도 이해가 되게끔 스토리를 짜맞춰요. 감정이 있기 이전에 이성으로 감정이 생긴다고 생각해야 하니까. 전 그냥 무턱대고 마냥 슬픈 건 생기지 않아요. 처음에 제의를 받았을 때는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평범한 대학생에서 배우라. 완전 인생 유턴인데. 사실 그건 ‘획기적인 제안’ 같은 거였어요.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든, 유학을 가든, 결국에는 다 비슷한 제안을 받는 인생이 예정되어 있는 사람에게 너무나도 획기적인 제안. 처음에는 살짝 발만 담갔다가 돌아가자고 생각했어요. 일 년만 아르바이트처럼 해보자. 근데 그 일 년 만에 너무 잘된 거예요. 재미도 있고요. 그러다 지금까지 오게 된 거죠. 이제 더 이상 멈출 수도 없거니와 하면 할수록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도 생겨요. 제 또래 배우들에 비해 뒤처지지는 않아야겠다는 오기도 생기고.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어요? 특정한 누구는 없어요. 비슷한 위치에 있는 배우들은 사실 다 저보다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서요. 본인은 어떤 노력을 하는데요? 좀 더 세상과 사람을 관찰해요. 영화를 봐도 다른 배우들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보고. 근데 사실 더 열심히 할 수 있는데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왜요? 방법이 있어야 있는데, 그게 없어서요. 공부할 때는 오늘 몇 시까지 얼마나 풀고 가자 그런 구체적인 계획이 있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그 동안 해보지 않은 거라 아직 그 방법을 못 찾은 것 같아요. 미니홈피 보니까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 것 같던데. 전에는 친구들이랑 웃긴 사진 찍는 거 많이 했어요. 지금은 다 비공개로 돌려놨죠. 열리면 전 끝나요. 연차에 비해 은근히 다작이에요. 그러고 보니 전형적인 센 캐릭터들을 많이 했네요. 어떤 캐릭터가 본인과 가장 가까운 것 같아요? 딱 같은 건 없었던 것 같고, <못말리는 결혼>은 가볍고 장난치는 거 좋아해서 편하게 할 수 있었고, <행복합니다> 같은 경우엔 센치한 면이 비슷했어요. 캐릭터를 볼 때마다 조금씩 저와 비슷한 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하죠. 이번 영화 <여름, 속삭임> 윤수와는요? 까칠한 점? (웃음)원래 윤수가 까칠한 캐릭터가 아닌데, 제가 하다 보니까 까칠해졌어요. 헤어 스타일이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 같던데? 포스터 보고 왜 2:8이지? 라고 생각했어요. 그거 가발이에요. 작년 여름에 머리를 밀어서 가발을 썼어요. 8월에 전주에서 찍어서 진짜 너무 더웠어요. 가발이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가발 쓴 본인의 모습은 맘에 들어요? 음, 영화에는 그 정도면 양호하게 나왔어요. 촬영할 땐 말도 못할 정도였어요. 가르마 막 이쪽에 가 있고. 티 안 나면 성공한 거죠. 미니홈피는 전혀 관리 안 하던데 악플 같은 거 신경 쓰는 타입 아니죠? 전혀~ 신경 안 써요. 워낙 낙천적이거든요. 신경을 안 쓰는 게 점점 그릇이 커지는 과정인 것 같고요. 신경 써봐야 기분만 나쁘죠. 전에는 ‘뭐야’ 이러면서 불끈해서 가보기도 했지만 그냥 놔두는 게 편해요. 정말 제 결함에 대해 썼다면 그것도 열 받을 건 아니죠. 고쳐야 하는 거니까. 이런 식으로 자신을 이해시켜요.(웃음) 낙천적이구나. 나라면 진짜 못 견딜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크게 충격을 받을 만한 게 없어요. 사생활이 워낙 깔끔해서.(웃음) 사실 <여름, 속삭임>은 요새 영화 치고는 좀 밍밍하잖아요. 얼음 많이 넣은 파랫국 같아요. 얼핏 잘 어울리지는 않는데 어떻게 하게 됐어요? 보다가 자고 그러죠?(웃음) 그냥 이런 분위기가 좋아서 하겠다고 했어요. 영화로 나오긴 했지만. 단막극으로 나와도 참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영조와 윤수의 로맨스가 좀더 확대되지 않은 게 좀 아쉬워요. . 그러게요. 둘이 언제부터 끌리기 시작한 건지 잘 모르겠던데? 그게 정확히 안 나와 있어요. 서로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같은 곳에 있다 보니까 생기는 끌림인데, 그 끌림 자체가 이성간의 끌림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영화 자체에도 애매하게 되어 있고. 마지막에 고쳐놓은 타자기를 돌려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게 편집이 되어 좀 어색해요. 그 장면 자체도 연기하기가 쉽지 않았고요. 감독님은 깔깔대면서 끝나기를 바라셨는데 그게 웃음이 나오는 장면은 아니었어요. 고양이 ‘덩치’와의 작업은 어땠어요. 눈 껌뻑껌뻑하는 게 아주 귀엽던데. 사실, 전 고양이를 극도로 싫어해요. 사람들이 뱀을 싫어하는 것만큼요. 주인도 못 알아보잖아요. 특히나 덩치는 털이 너무 많이 날렸어요. 안고 나면 먼지 덩어리처럼 수북했죠. 아으. 의외네. 영화가 첫사랑에 대한 얘기잖아요. 본인 첫사랑은 어땠어요?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아요. 대학교 1학년 때였는데 처음이라 나름 순수하게 잘 만났어요. 근데 알고 보니까 제가 세컨드였던 거죠. 그 후의 연애에도 영향을 미쳤겠어요. 여자를 잘 못 믿는 경향이 있어요. 사귀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철저한 뒷조사에 들어가죠. (웃음) 전 약간 나쁜 남자 스타일이에요. 내가 보고 싶을 때 보고, 내가 친구 만날 때는 안 보는 식.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애인보다 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전엔 헬스클럽 가야 한다고 7시에 저녁 먹고 9시에 헤어진 적도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린애 같은 행동이죠. <행복합니다>의 강석도 나쁜 남자 같아요. 그런가. 하긴 처음에 감독님은 짐승처럼 거친 그런 느낌을 원했어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난하지만 기본적인 인격 자체는 나쁜 놈은 아닌 걸로 설정했죠. 근데 나중에 8~9회쯤 가다 애다와 애다 친구들이랑 생일 파티에 갔는데, 애다가 카드를 쥐어주는 장면에서 짐승 같은 폭발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감독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전 그때 알았죠. 그렇게 표현했어도 매력 있는 캐릭터가 됐을 것 같아요. 연애를 몇 번 하다 보면 좋아하는 타입을 어느 정도 알게 되잖아요? 어때요? 전 무조건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좋아해요. 나에게 없는 섬세하고 감정 표현을 잘하는 면이 좋아요. 배우로서 롤모델은 누구예요? 이병헌 씨와 디카프리오. 이병헌 씨의 강한 남성적인 느낌이 멋있어요. 액션이나 말투, 연기가 절도가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 <번지점프를 하다> 같은 영화는 너무 순박해 보이잖아요. 그건 하석진 씨도 그런 거 같아요. 오늘 보니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확확 다르던데요. 근데 제가 아직 그걸 사용할 줄 모르는 것 같아요.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요령이 부족해요. 배우로서 어떤 욕심이 있어요? 서른에서 서른다섯쯤 꽃이 폈으면 좋겠어요. 남자 인생에서 그때가 가장 멋진 나이 같거든요. 아직은 경험도 부족하고 노력해야 하니까 좀 차근차근 밟아나갔으면 좋겠어요. 이제 슬슬 주연을 한두 번 해봤는데, 그런 건 의미가 없는 것 같고 툭툭 부딪쳐보면서 다양한 역할을 해나가고 싶어요. 전공이 꽤 적성에 맞는다고 했잖아요. 혹시 미련은 없어요?어떻게 보면 무난하고 안정적인 길을 버리고 배우라는 직업을 택한 건데, 미래에 대해 불안하지는 않나요? 제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러면 아예 못하죠. 뭐랄까. 이 일을 하면서 뒷걸음질칠 수 있는 구석을 만들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적어도 이 일은 세컨드 플랜을 만들면 충실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잖아요? 그래도? 돌아갈 수 있죠. 그래도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몇 년 모아둔 돈으로 카페를 차린다던가 쇼핑몰을 한다든가, 또 다른 걸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결국 제 부족한 점을 채우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지금 와서 말하는거지만 에디터와 그는 같은 학번이다. 남자라곤 퀵서비스 아저씨 외에는 찾아볼 수도 없는 편집부 사무실을 나섰을 때, 마음이 웬지 설랬던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어떤 수작도 그 앞에선 결국 잡담이 되었다. (이건 단지 매니저와 스태프들이 너무나 바싹 붙어 있기 때문이다) “회사 다니면, 학생 남자친구는 싫지 않아요?”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베어 물으며 ‘학생’인 하석진이 물어온다. 음, 이럴 땐 뭐라 답해야 하는 건가. 아직 연기라는 함수의 공식을 찾지 못한 그처럼, 하석진이라는 문제도 쉽게 풀리지는 않는다. 한 가지 공식만 알면 금방 풀려버릴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그가 변주 가능한 다양한 이미지와 스물일곱 남자의 단단한 욕심으로 천천히 존재를 드러내면, 언젠가는 그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좀더 문제를 쉽게 내주거나, 비슷비슷한 문제를 몇 번이고 연습장에 풀다 보면 말이다. 일단 에디터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럴 줄 알았다. 그는 똑똑한 공대생이고, 에디터는 그가 고양이를 싫어하는 것만큼 수학을 싫어한다. 그는 참 까칠한 남자이고, 여자는 언제나 그런 남자에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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