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의 베드가즘] 나는 눕고 싶다

침대와 사랑에 빠진 2535 싱글들. 우리는 왜 이토록 ‘베드가즘’에 탐닉하는 걸까. 거부할 수 없는 베드가즘에 대한 사회·문화적, 의학적, 심리학적 분석.
BY | 2015.08.05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31세 A의 이야기. “나는 경쟁에 익숙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더 나은 ‘스펙’을 갖기 위해 바쁘게 살았다. 부모님은 스펙이 좋아야 좋은 대학에 가고, 그래야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하셨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영어학원에 가라면 군소리 없이 가방을 쌌고, 영어학원이 끝나면 보습학원에 갔다. 대학원서를 쓰던 날 담임선생님은 전공보다는 일단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했다. 그래야 이다음에 사회에 나갔을 때 동문들끼리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고 한다고. 그게 바로 학연이고 인맥이라고. 그런가 보다 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남들 하는 거 다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정작 내가 뭘 원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는 잘 모른다. 난 언제나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것을 하며 살았다. 코피를 쏟아가며 취업 준비를 한 것도, 취업 전쟁에서 낙오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직장인이 되고 보니 뭔가 허무하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봤자 뭐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회사에서는 프로젝트, 분기별 보고, 제안서 작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야근을 하는 날보다 야근 안 하는 날을 세는 게 더 빠르지만, 내가 죽도록 일하는 건 대단한 야망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회사를 계속 다니려면 이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 바쳐 힘들게 일해봐야 월급이 더 오르는 것도 아니고, 언제 회사에서 잘릴지 모른다는 점에선 사원이든 임원이든 공평하게 불안정하다. 당장 내일 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미래를 준비한답시고 괜히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다. 지금 당장 놀고, 쉬고, 소소하게 재미있는 거 하면서 설렁설렁 살고 싶다.” 한국 직장인의 평균 근무시간은 주 45.1시간으로 OECD 국가 중 1위다. 주 5일 근무를 한다면 하루에 꼬박 9시간씩 일하는 셈이다. 칼퇴근하는 몇몇 행운아들을 빼면 우리 중 대다수는 매일 10시간 이상을 답답한 사무실에 갇혀 지낸다. 그러니 퇴근 후에는 뭐가 됐든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쓰고 싶어진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눕는다. 씻는 것조차 귀찮다. 침대에 눕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침대에서만 가능하다. 일단 침대를 벗어나기만 하면 다시 돌아와 그곳에 누울 때까지 바삐 종종거리며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만 한다. “우리가 흔히 ‘멍 때린다’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현대인의 특성 중 하나는 가만히 있길 바란다는 것 같아요. 쓸모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거죠.” 대중문화 웹 매거진 <아이즈> 최지은 기자의 이야기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광고 속 메시지는 20, 30대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터치로 간편하게 모든 것을 해결하는 스마트폰 시대의 아포리즘이자, 지갑에서 카드 한 장 꺼내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도시인의 ‘귀차니즘’이다. 최지은 기자는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일종의 사치’라고 설명했다. 힘들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와서 자기 전에 잠깐 게으름 좀 피워보겠다는데 그게 무슨 사치냐고? 사치의 사전적 정의는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이다. “시간 없다”고 투덜거리는 도시의 삶에선 일분일초가 소중한데, 우리는 침대에서 뒹굴며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한다. 이게 사치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슬프다. 누울 곳밖에 없다 ‘먹고 누우면 소 된다’는 속담이 있다. 밥을 먹고 바로 누우면 소화가 잘 안 된다는 의미다. 단지 건강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유사 이래 누운 자세는 게으름뱅이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지만 우리는 누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집에는 물리적으로 누울 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누워 지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원인은 공간이에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윤이나가 지적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1인 가구의 증가다. 주요 대기업의 본사는 대부분 서울 등 수도권에 있다. 수도권 기업들의 법인세는 총 법인세의 60%를 차지한다. 지방에는 취직할 곳이 마땅치 않다. 결국 젊은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모인다. 여기에 취업 후 진정한 독립을 꿈꾸는 싱글들이 더해진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서울 지역의 1인 가구 비율이 지난해 사상 최초로 40%를 돌파했다. 세 집 중 하나가 1인 가구인 셈이다. 전국적인 비율을 보면 지난 2000년 15%에 그쳤던 1인 가구 비율이 2014년 26%까지 증가했고, 2035년에는 약 34%에 달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대도시의 집값이 만만치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적게는 수십만원, 많게는 100만원 가까운 월세를 내야 겨우 원룸이라는 방 한 칸을 얻을 수 있다. 20, 30대 싱글의 경제력으로 구한 공간에 TV와 침대 등 꼭 필요한 세간을 몇 개 놓고 나면 남는 건 겨우 지나다닐 만한 공간뿐이다. 조금 넓은 곳에 살아도 기껏 책상 앞 의자, 손바닥만한 소파 하나 놓을 공간뿐. 종일 의자에 앉아 일하다 왔는데 또 앉으라고? 결국 다시 침대를 찾게 된다. “현재 젊은 세대에게 허락된 공간은 집이 아닌 방입니다. 침대 하나 놓으면 가득 차는 좁은 방에 불과하죠. 결국 나만의 공간이라는 게 침대 하나에 불과한 거예요.” 윤이나의 이야기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결국 우리를 침대 안으로 몬다. 그럼 넓은 곳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떨까? 침대에서 즐기는 취미 생활,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라 밖에서 즐기는 레저 활동 말이다. 최지은 기자는 침대를 벗어나 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소위 ‘5포 세대’라고 하죠. 연애를 하지 않으니 구태여 침대를 벗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5일 내내 회사 업무에 지친 사람들은 주말에 밀린 잠을 몰아서 잔다. 일어나보면 점심시간도 훌쩍 지난 오후. 그쯤 되면 챙겨 입고 어디 나가서 노는 것도 귀찮다. 지옥철에 몸을 실어야 하는 월요일 아침을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다. 결국 남은 주말도 침대에서 보낸다. ‘집값’ 중 월세의 비중이 높은 것 역시 이런 악순환의 중요한 요인이다. 지난해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2014년 임금조정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4년제 대졸 신입사원의 평균 초봉은 월 278만4000원이다. 매달 나가는 월세와 기본적인 생활비만으로 월급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이 사라진다. 어렸을 적에는 버는 돈의 절반 이상을 저축하라고 배웠는데, 요즘 그래 가지고는 출퇴근도 어렵다. 불안한 미래에 대비하려다 보니 연금보험은 늘고, 안전 자산인 저축은 준다. 2014년 보험연구원의 ‘보험소비자 설문조사’에 따르면 20대 1인 가구당 월평균 저축액은 14만9800원에 불과하다. 1억원을 모으기 위해서는 50년 이상 저축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어차피 은행 금리가 바닥이니 굳이 이자까지 계산할 필요도 없겠다. 결국 30대가 될 때까지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원룸을 벗어나지 못한다. 피곤하니까 눕는다 지난 4월 취업 전문포털 ‘파인드잡’이 직장인 108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피로 해소에 관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49%가 피로를 푸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남은 51%는 운동(25.2%), TV나 영화 보기(14.8%), 연애(13%) 순서로 대답했다. 운동을 제외한 두 가지 답변은 침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집에서 TV를 시청할 때는 침대나 소파에 눕는다. 연애할 때도 일주일에 최소 두어 시간은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피로를 푸는 방법조차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왜 자꾸만 침대에 눕고 싶을까? 동국대학교 일산불교한방병원 여성의학과 김동일 과장은 피로에 지친 허리가 쉬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고 이야기한다. “종일 서거나 앉아 있다 보면 허리에 큰 무리가 가요. 그래서 집에 돌아와 쉴 때는 하루 종일 지친 허리를 쉬게 해줘야 하죠.” 허리가 아픈 사람에게 가장 편한 자세는 눕는 것이라고 한다. “척추에 실리던 체중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어 디스크에 가해지던 압력도 줄어들기 때문이죠.” 심리적 이유도 있다. 누우면 부교감 신경이 활성화된다. “누웠을 때는 세로토닌 등이 분비되며 긴장이 풀리고 안정을 느낄 수 있어요. 침대는 온전히 자기만의 공간인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자꾸 침대를 찾는 것은 안식처를 찾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휴식을 취하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침대에서의 휴식은 스트레스를 없애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강남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서호석 교수는 “침대에 누우면 육체 피로를 해소하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정신 피로까지 말끔하게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대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되는 엔도르핀이 발생하는 퇴근 후 취미 활동이나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교 생활을 권한다. “피곤해” “시간 없어”라며 피하던 일들이 사실은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되는 것. 중산한의원 서인교 원장은 그래도 침대를 포기할 수 없다면 규칙적으로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길 권한다. “2분 정도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로와 긴장이 다소 누그러지고, 기지개를 켜고 목을 돌리는 스트레칭을 더하면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더뎌진 혈액순환을 다시 원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한다는 결론. 서 교수가 베드가즘에 빠진 사람들에게 걱정 어린 조언을 했다. “피곤하니까 곧장 침대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지내다간 사회성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누워도 잠이 들지 않는다 침대에 누웠다고 해서 곧장 잠이 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누운 채 끊임없이 뭔가를 한다. 스마트폰 덕분이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친구의 안부를 묻거나 확인할 수 있고, 게임을 즐길 수도 있다. 화상 통화도 가능하니 연애도 문제없다. 누구나 한 번쯤은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얼굴 위로 떨어뜨리고 비명을 지른 (그리고 “나 방금 아이폰을 얼굴에 떨어뜨려서 이마 깰 뻔했음”이라고 트위터에 쓴)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침대에 누워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이었다. 잠을 자거나 자세를 바꿔가며 책을 읽는 것, TV 보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면 침대의 역할도 드라마틱하게 변화한다. 시청률 조사기관인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20, 30대의 하루 평균 TV 시청 시간은 2002년 3.2시간에서 지난해 1.4시간으로 감소했다. 10년 동안 줄어든 절반은 어디로 갔을까? 몇 가지 다른 통계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 동안 스마트폰 보유율은 24.2%에서 79.5%로 껑충 뛰었다. 같은 기간 통신 3사의 VOD 총매출도 1344억원에서 4150억원으로 급증했다. 물론 VOD의 주 소비층은 IPTV 사용자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이용한 비중도 무시할 수 없다. 스마트폰으로 VOD를 보는 비율도 2013년 1.56%에서 1년 만에 배 이상 증가한 3.29%다. IPTV에서 보던 VOD를 스마트폰으로 이어 보는 앱도 있다. SNS도 많이 한다. 올 3월 앱 개발회사 NBT 파트너스가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응답자의 61.8%가 하루에 2~3회 정도 SNS에 접속한다고 답했다. 대부분의 SNS 접속 시간은 출퇴근 혹은 침대에서다. 타임라인이 바쁘게 움직이고,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리는 시간이다. 마치 일기를 쓰듯 하루를 마무리하는 내용을 올리고, 친구의 포스트 아래서 댓글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침대에서 읽고 있는 책, 보고 있는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쓴다. 침대에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한다. 잠깐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두세 시간이 도둑 맞은 것처럼 뭉텅뭉텅 사라진다. 잠도 안 온다. 스마트폰의 밝은 화면이 수면을 유도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의 분비를 억제하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은 길어졌지만 수면 시간은 줄어들었다는 아이러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침대로 들어간다고들 하지만, 가만 보면 우리는 침대에서 끊임없이 뭔가 하고 있다. 소위 ‘생산적인 일’이 없을 뿐이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책을 읽는 것, 음악을 듣거나 SNS에 열중하는 것, 혹은 아무 생각 없이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하루 중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윤이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침대는 애인과 같은 존재다. 한 번 만나면 좀처럼 헤어지기 싫고, 헤어지자마자 곧장 그리워진다. 저 바깥 세상이 제아무리 각박하고 살벌한 전쟁터 같더라도, 내 침대로 돌아와 누우면 세상 그 누구도 이 안전한 평화를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침대에서 게으름 좀 피우면 어떤가. 오히려 이왕 게으름을 피울 거라면 좀더 적극적으로, 행복하게 게을러져야 한다. 뭔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원래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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