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의 서재
우연히 접한 짧은 시 한 편을 통해 일상의 괴로움을 잊던 배우 이준혁. 드라마 속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이준혁의 이야기다. 그런 그에게 시를 이야기하는 드라마가 찾아왔다.
BY 에디터 김용현 | 20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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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살아 나가라.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들을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뿐.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인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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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 짧은 글을 올리거나 매일 한 편의 시를 전하는 작가나 크리에이터의 팔로어가 수만 명에 이른다. 매일 다른 시를 추천하는 앱도 있고, SNS에 올린 짧은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낸 작가도 있다. 우연히 접한 짧은 문장이 전하는 위로 덕분이다. 그리고 여기 시가 머금은 힘을 체험한 배우도 있다.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촬영 중인 이준혁이다. 그가 시를 읽기 시작한 건 오랜 일이 아니다. 물론 드라마 때문도 아니다. “누군가가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시를 우연히 접하는 게 전부였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던 지난해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접한 시 한 편을 통해 많은 힘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 후로 검색을 통해 종종 시를 읽곤 해요.” 그렇게 만난 시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생'이다.
“길이도 짧은 덕에 금방 읽을 수 있어 접근성도 좋잖아요.” 그가 생각하는 좋은 시는 자신의 경험과 통한다. “제가 처한 상황과 어울려야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친구에게마저 하지 못한 힘든 이야기도 위로를 받을 수 있잖아요. 마음이 통한 시를 읽고 작가에 대해 조사를 해보면 그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끔은 친한 친구 같은 생각이 듭니다. 직접 만나진 못 하겠지만.” 그렇게 몇 권의 시집을 읽던 차에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만났다. “신기했습니다.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리고 저 역시 시처럼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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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혁과 드라마나 영화의 만남이 이렇게 운명적인 건 이번 드라마가 처음은 아니다. 그는 또래 친구들과는 분명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드라마를 통해 그들과 같은 고민을 했다. '파랑새의 집'에서 취업을 고민하던 김지완과 결혼의 현실에 충격을 받은 '유부녀의 탄생'의 망고 역할이 대표적이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처럼 관심사가 곧장 드라마로 연결된 예는 또 있다. 한동안 그는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에 빠져 지냈다. 일본에서 출시한 가정용 인공지능 로봇 ‘페퍼’를 구입하려던 때에 그는 드라마 '너도 인간이니'를 만났다.
“당장의 관심사나 친구들과 모여서 하던 이야기가 내 드라마를 통해 전달되던 때가 있어요. 작품 활동을 하며 고민의 해답을 찾곤 합니다. 집에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는 제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기도 하죠.” 그래서 그가 작품을 통해 뿌듯한 감정을 느끼는 지점은 색다르다.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는 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누군가도 좋아한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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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준혁이 좋아하는 건 시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다. 작품을 고를 때도 캐릭터가 아닌 이야기에 집중한다. “고전에 담긴 이야기는 수십,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 읽어도 메시지를 줄 만큼 강렬합니다.” 그가 좋아하는 소설은 '위대한 개츠비' '적과 흑' '마담 보바리' '살인자의 건강법'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Q84' 등. “얼마 전에는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을 선물 받았어요. 단편 하나를 읽었을 뿐인데 소설 전반을 둘러싸고 있는 차가운 기운이 한 권을 다 읽은 것처럼 강렬하더라고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라며 미리 준비한 두 권의 책을 꺼낸다. '인 콜드 블러드'와 '앵무새 죽이기'다.
“'비밀의 숲'의 대본을 읽는데 문득 '인 콜드 블러드'가 떠올랐습니다. 두 작품에 스민 정서가 유사하게 느껴졌거든요. 보통 때는 원작이 있는 영화나 드라마도 작품을 준비할 때는 일부러라도 책을 읽지 않는데, 당시에는 작품을 준비하며 트루먼 카포트의 소설을 다시 꺼내 읽었어요.” 결국 책과 함께 준비한 드라마 '비밀의 숲'은 이준혁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큼 큰 화제를 모았다. “서동재 검사는 인간 이준혁의 반대 지점에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며 큰 매력을 느꼈어요.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라고 해야 하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부러라도 자존심을 굽히고 박쥐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사는 사람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치졸하지만 치열하게 사는 사람을 이해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만약 내가 서동재를 만난다면 어떻게 대할까?’란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더라고요. 욕하면서 이용했겠죠. 그러니까 더 잘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준혁이 가장 좋아하는 서동재의 모습은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그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었음에도, 그리고 개과천선을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과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지낸다. “정신 못 차리는 그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더니 계속 거길 벗어나질 못하잖아요(웃음). 멋있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애착이 갑니다. 시즌 2가 제작된다면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나오면 좋겠어요.”
이준혁은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서 물리치료사를 연기한다. “훈남 치료사라고 하는데, 그것도 저랑은 거리가 멀어요(웃음).” 사실 그는 스스로를 내세우는 성격이 아니다. 화보를 촬영하던 때에도 그는 연신 부끄러워하며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잘생기고 멋진 모습과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멜로물의 출연도 피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뻔뻔한 척 믿고 가보려고 합니다. 대본이 무척 재미있거든요.” 사실 이준혁이 새 드라마를 통해 가장 많이 기대하는 건 멜로다. “스스로 굉장한 변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동재와 같은 악역을 맡은 것보다도 더!”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상반기에 방송이 예정된 '너도 인간이니'에선 반대로 굉장히 딱딱한 인물을 연기하기 때문이다. “배트맨의 비서인 알프레도와 같은 충직한 모습 그리고 남자다운 면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간극이 큰 두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지 기대가 크죠. 두 작품이 연달아 방송을 마치면 그 반응을 보는 것도 무척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수트와 니트 에트로, 슈즈 지미추.
미래에 대한 기대와 달리 이준혁은 요즘 좀 심심하다고 말한다. “친구들을 만나면 매번 서로 ‘뭐 재미있는 거 없어?’라고 물어요. 그러다 보니 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사람들은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은지, 미니멀한 삶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면 될지.” 연애에 대한 고민과 노력도 필요한 시기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확인하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럴 때 자연스럽게 한 번 더 만나자고 이야기합니다(웃음).” 선수일 수도 있겠단 이야기에는 손을 내젓는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생색 내지 않고 퍼주는 편이랄까?” 착한 남자의 연애는 힘들 수 밖에 없다.
“무작정 가까이 다가가는 건 쉬워요. 하지만 내 매력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죠. 사람을 만날 때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좋은 영향을 주고 싶거든요. 그러다 보니 연애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웃음).” 이준혁은 지금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이다. 그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 과거에 있었던 일을 잘 까먹기 때문은 아니다. 물론 그는 이미 지나간 일에 연연하는 편도 아니다. 조금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그는 촬영을 마친 작품의 모니터링도 좀처럼 하지 않는다(사실은 자신의 연기를 다시 보는 게 무척 부끄럽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이준혁의 모습은 모두 어느 정도의 진짜 이준혁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책을 뒤지며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책을 통해 머금게 된 다양한 정서를 작품을 통해 표현할 수 있길 바래요. 연기 실력을 더 갈고 닦을 필요도 있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작품에 출연해야 가능한 일이죠.”
그가 마지막 한마디를 건네며 부끄러운 듯 웃는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올해만 해도 벌써 이준혁의 이름이 새겨진 작품이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와 '너도 인간이니' 그리고 영화 '신과 함께'의 두 번째 이야기까지 세 편이나 기다리고 있다. 불현듯 이런 이준혁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정호승) 그는 자기에게 필요한 걸 잘 아는 배우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얻어낼지도 무척 잘 알고 있다.
사진
최성현
싱글즈
스타화보
이준혁
시를잊은그대에게
비밀의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