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내 연애도 가스라이팅일까?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가스라이팅 신호들.
BY 에디터 김희성 | 2021.06.19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남편이 있다. 그는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외출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내의 물건을 숨기고는 ‘당신은 물건을 잘 잃어버리잖아’라고 말하고 집 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희미하게 해놓고도 아내가 어둡다고 말하자 당신이 잘못 본 것이다, 왜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며 핀잔을 준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녀는 자신의 기억 중 어디까지 진실인지조차 헷갈린다.
이제 집 안에서 나는 소리가 실제인지 아닌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아내는 남편을 향해 외친다. “날 혼자 두고 가지 말아요. 집이 울어요. 자꾸 발소리가 들려요.” 영화 <가스등>에서 유래한 가스라이팅은 정서적인 학대를 통해 상대방의 현실감과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을 뜻한다.
가스라이팅을 최초로 규정한 정신분석가이자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은 대외적으로 유능하고 매력적이라 평가받지만 가정에서는 자존감을 갉아먹는 관계를 유지하며 우울해하는 환자들을 많이 봐왔고 이는 가스라이팅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가스라이팅은 스스로 가스라이팅 피해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자존감을 잃지 않고 건강한 연애를 지속해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관계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자가진단을 위해 로빈 스턴이 언급한 가스라이팅 체크리스트도 소개한다.

CASE 1 원피스를 좋아해 즐겨 입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드는 건 몸에 살짝 피트되고 무릎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길이의 원피스다. 키가 그리 크지 않지만 허리는 날씬한 편이라 실루엣이 적당히 살아나고 비율도 좋아 보인다. ‘원피스가 참 잘 어울린다’던 그는 사귀기 시작한 이후 옷차림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를 입지 마라’ ‘그 모임에 가는데 화장은 왜 이렇게 진하게 해?’ 같은 잔소리에 처음에는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라고 하는 그의 말을 믿고 싶어진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SOLUTION 가스라이팅이 무서운 건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피해자가 이를 인지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화장 좀 연하게 하라거나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예쁘게 꾸몄느냐 같은 말들은 가스라이팅의 시작.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며 사소한 것부터 상대를 통제하려 든다.
나아가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니 그 사람이 오해해서 자꾸 연락하잖아’ 같은 식으로 몰고 가며 ‘내가 정말 오해를 살 만하게 행동했나?’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세계보건기구는 통제행동을 데이트 폭력에 포함했다. 조언과 지적은 구분하자. 혹시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옷 입는 스타일이 바뀌진 않았는지 과거부터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곰곰이 생각해보자.
원래 꾸미는 걸 좋아했지만 그를 만난 이후 흥미를 잃었다는 것도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신호. 나의 개성을 하나둘 상대방의 취향에 맞추다 보면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게 무엇이었는지도 망각하게 되니 단호하게 대처하자.
CASE 2 평소 가보고 싶은 카페가 있어 저장해 두었다 남자친구와 만나는 날 같이 가보자고 말했다. 커피를 마시다 그가 자신의 옷에 음료를 쏟게 됐는데 물티슈를 꺼내 닦아주는 내게 ‘네가 여기 오자고 안 했으면 괜찮았을 거 아냐’ 하며 화를 냈다. 나도 모르게 ‘미안해’라고 말했다.
SOLUTION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쪽은 언제나 나다. 엄밀히 따지만 그 카페에 간 것과 음료를 쏟은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게 다 내 덕분에 된 것’이라며 자신의 공을 강조하고 그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나를 탓한다. 당신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과하게 만드는 것도 가스라이팅의 대표적인 사례다.
감정적으로 학대를 당하다 보면 자기 자신이 부족한 존재라 여기기 쉽다. 당신의 불찰이 아닌데도 ‘미안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면 논리적으로 왜 이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반박하는 것도 괜찮은 대처법이다.

CASE 3 나에게 약속이 있는 날엔 그가 더 예민해진다. 카톡 답장을 실시간으로 하지 않으면 바로 전화가 걸려온다. 친구들이랑 놀고 있을 때도 지금 어디서 뭘 먹고 있는지 사진을 보내줘야 안심하는 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휴대전화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업무적으로 알게 된 이들과 차 한잔, 식사 한 끼를 할 때는 더더욱 신경이 곤두선다. 친구들과 있을 때보다 연락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어디서 누구와 뭘 했는지, 새로 친해지게 된 사람은 어떤 연유로 서로 알게 되었는지 꼬치꼬치 캐묻는다. 상대가 이성일 경우에는 둘이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닌지 하도 의심을 해 결국 주고받은 메시지를 탈탈 털리고 그가 보는 앞에서 스피커폰으로 통화까지 인증해야 했다.
이런 일을 겪다 보니 ‘남자 사람’에게 연락 오는 것 자체가 눈치 보이고 피곤한 상황이 펼쳐질까 두려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게 됐다. 이런저런 핑계로 만남을 미루다 보니 나에게 만나자고 연락하는 사람도 이제 없다.
SOLUTION 상대방을 과도하게 옭아매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연인은 이것이 사랑이라 말한다. “진심어린 걱정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타인의 일정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은 감정적으로 학대하는 사람이 상대를 틀어쥐기 위해 자주 쓰는 방법이다.”
트라우마 치료 전문가 리사 페렌츠의 말처럼 이는 당신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에 가깝다. 감정적 학대를 받다 보면 상대가 나를 의심하고 추궁하는 상황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아 정상적인 인간관계마저 망쳐버릴 때가 많다. 지금의 연인을 만난 이후 주위 사람들과 나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돌이켜보는 것이 좋겠다.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들은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도 ‘이게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라며 피해자를 세뇌시키는 경향이 있다. 통제권을 틀어쥐고 관계를 조종해 자신이 상대방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에 대해 주입시킨다. 불편하거나 강압적인 상황이 생길 것을 미리 걱정해 당신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진 않은지도 생각해보자.
CASE 4 남친과 자주 다투는 편이다. 너무 싸워서 지칠 때도 있지만 싸우면서 정든다는 말을 믿는 편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문제는 싸울 때마다 큰 상처가 남는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믿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종종 비수가 되어 꽂히는 말도 한다.
그럴 때마다 억울하고 답답해 병이 날 것 같아 헤어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지만 싸우고 난 다음 이전보다 더 다정한 태도로 기분을 풀어주려는 그에게 다시 마음을 열고 만다.
SOLUTION 주로 상대방의 잘못으로 싸우거나 언어 폭력, 혹은 신체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지만 로맨틱한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용서하고 마는 패턴이다. 애증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상대방의 방식대로 길들여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달콤한 말과 상황에 마음이 약해지거나 그 순간 사랑 받는 느낌이 좋아 이런 관계를 지속하다 보면 ‘사랑은 싸우면서 더 깊어진다’고 합리화하게 된다. ‘다음에는 괜찮겠지’ ‘그가 오해한 거겠지’라는 생각은 당신의 판타지일 뿐이다. 그와 싸울 때 ‘너는 너무 예민해’ ‘너 혼자 착각한 거겠지’ ‘나 아니면 누가 너를 이해하겠어’ 같은 말을 듣는지 떠올려보라.
심지어 당신이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고 우겨 인정하게 만든다면 이 관계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CASE 5 얼마 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맥북을 샀는데 ‘너에겐 맥북보단 아이패드가 딱인데 왜 돈 아깝게 맥북을 샀냐’고 했다. 머리를 자른 날에는 ‘긴 머리가 낫다’며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저께 산 주식 종목에 대해서도, 내가 다니는 피트니스센터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아본 게 맞는지 확인한다.
한 3년 동안 사귀다 보니 이제는 오늘 점심에 뭐 먹을지부터 퇴사, 이직 같은 중요한 일까지 일일이 물어보게 된다. 아주 사소한 일도 그의 ‘컨펌’을 받아야 마음이 놓인다. 그동안 이렇게까지 나를 챙겨주는 사람을 만나본 적 없기에 행복하지만 그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때때로 불안에 휩싸인다.
SOLUTION 사랑하는 사람과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어진다. 회사나 집에서도 말하기 어려운 비밀을 털어놓으며 서로에게 훌륭한 조언자가 되기도 한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관계이니만큼 그 조언은 꽤 유효하게 작용할 때가 많다. 언뜻 생각하면 사랑이 넘치는 연인의 관심과 애정 같기도 하지만 주체적인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관심, 조언과 구분하기 어렵다고? 연인의 애정 어린 조언은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을 주지만 가스라이팅은 결정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가스라이팅을 지속적으로 당하다 보면 아주 사소한 판단조차 하기 어려워진다. 그 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상황은 심각하다. 상대방에게 질문하고 동의를 구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보자.
내가 잘 몰라서 그가 그러는 걸 거야, 하도 덜렁대서 그래, 그가 남들보다 섬세한 성격이라 그럴 거라며 그를 이해하려는 생각은 지금 이 시간부터 그만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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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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