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자가 세운 19금 웹툰의 세계

단순히 자극적이기만 한 콘텐츠가 잘 팔리는 시대는 지났다. 특히 여성 독자들은 취향에 취향을 더해 19금 웹툰 하나도 까다롭게 고른다.
BY 에디터 송혜민 | 2021.07.09
지난해 전체 웹툰 시장 매출 규모가 역사상 처음 연 1조원을 넘어섰다. 대부분 유료 서비스로 제공되는 19금 웹툰은 명실상부 웹툰 전문 플랫폼의 킬러 콘텐츠다. 실제로 레진코믹스, 봄툰, 탑툰, 투믹스 등의 주요 플랫폼은 성인 타깃 콘텐츠로 수익을 내며 성장했다. 레진코믹스가 처음 서비스를 시작한 2013년만 해도 웹툰은 포털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무료 콘텐츠라는 인식이 강했다. 작가에게 돌아가는 고료는 낮았고, 퀄리티도 하향 평준화됐다는 비판이 일었다. 장르의 다양성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또 웹툰은 10대의 전유물이라는 편견도 없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레진코믹스는 구매력 있는 성인들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네이버, 카카오와 같은 전 연령 대상 플랫폼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전략이었다. 시장의 빈틈을 노린 니치 마케팅인 셈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당시 연재했던 ‘나쁜상사’는 1년 만에 약 3억원에 달하는 수익을 거둬들였다. 지금이야 이 정도 수익을 올리는 작품이 많지만, 무료가 지배하던 시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유의미한 성과였다. ‘돈을 내고 본다’는 것은 무료와는 차별화되는 작가의 노력, 시간, 아이디어를 산다는 의미와도 같다. 기대치를 충족해야 팔렸다. 자연스레 질적, 양적 성장이 따랐다. 로맨스를 바탕으로 한 콘텐츠가 여전히 성인 웹툰 베스트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지만, 유료 구독자가 늘고 시장의 파이가 커지자 플랫폼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아졌다. 작가들에겐 스릴러, 일상, 액션 등 여러 장르의 작품 제작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었다. 봄툰의 봉희선 웹툰 PD는 “독자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작화의 퀄리티는 높아지고, 소재와 장르의 폭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고 요즘의 19금 웹툰 트렌드를 설명한다. 레진코믹스를 뒤이어 생긴 플랫폼들은 장르와 타깃 독자를 세분화해 성인 콘텐츠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미스터블루는 무협 웹툰을, 탑툰과 투믹스는 남성향 성인 웹툰을, 2015년 개설한 봄툰은 여성 독자를 겨냥했다. 따라서 오늘의 19금 웹툰은 성적 표현뿐 아니라 성인 독자들의 취향과 관심사를 포함하는 콘텐츠’로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콘텐츠 IP로서의 성인 웹툰 K-웹툰은 콘텐츠 시장의 핵심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로 자리를 공고히 하는 중이다. 2020~2021년 상반기 동안 국내에서 제작된 웹툰 기반의 드라마만 해도 30여 편에 달한다. 영화나 뮤지컬, 웹소설로 재생산된 것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성인 웹툰도 IP로 부지런히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 이 역시 콘텐츠로서의 질적 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2차 활용에서도 흥행을 기대할 만큼 팬덤이 있다는 얘기다. 2017년 장나라, 손호준 주연의 드라마 <고백부부>는 성인 웹툰 ‘한 번 더 해요’를, 최근 최고 시청률 18%를 기록하며 종영한 드라마 <모범택시>도 동명의 19금 작품을 원작으로 했다. 또 2020년부터 다음에서 연재한 19금 로맨스 웹툰 ‘미완결’이 드라마화를 앞두고 있다. 스토리와 캐릭터 설정, 그림체까지 삼박자를 고루 갖춘 웰메이드 작품들이다. 이렇듯 탄탄한 구성과 스토리라인이 뒷받침된다면 메이저 콘텐츠 마켓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더 폭넓은 아이디어와 시도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19금 웹툰 시장. 머지않아 콘텐츠 IP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성향 작품의 반격 업계 관계자들은 플랫폼 매출을 좌우하는 건 여성 독자들이라고 입을 모은다. 앞서 언급한 레진코믹스가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로맨스, 순정, BL(Boy’s Love) 등 여성 타깃의 성인 만화를 전략적으로 선택해왔기 때문이다(로맨스뿐 아니라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룬 BL, GL(Girl’s Love)의 주요 독자층은 여성이다). 또 웹툰을 소비하는 독자의 성별을 따져보면 무료 콘텐츠를 포함한 시장에서는 남성 독자 수가 우위에 있지만, 유료 결제를 하는 독자는 여성이 압도적이라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2030 세대에서 이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성업 레진 엔터테인먼트 본부장은 “20대 여성이 바이럴 마케팅의 핵심”이라며 “10대 여성도, 30~40대 여성도, 남성들도 20대 여성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김자현 코미코 웹툰 PD 역시 유료 결제를 하는 건 결국 여성들이라고 밝힌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는 법. 여성향 웹툰이 예전보다 더 많이 생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레진코믹스가 성과를 거두자 뒤이어 봄툰, 코미코, 큐툰 같은 여성 타깃 웹툰 플랫폼이 줄줄이 문을 열었다. 이들 역시 여성 독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장르를 주로 제작, 노출했다. ‘콘텐츠에 지갑을 열어줄’ 코어 구독자층을 확보한 뒤에야 전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으로 영역을 확대하는 전술을 폈다. 그렇다면, 여성 독자들이 선택하는 19금 웹툰에는 어떤 특별함이 있을까? 똑같아 보이는 로맨스 웹툰이라 하더라도 분명 기존과는 다른, 까다로운 성공 공식이 존재한다.
19금 로맨스 웹툰의 성공 키워드
어쨌든 대세는 러브 스토리다. 그 안에서 다양한 장르와 표현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성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작품 속에 숨어 있는 성공 키워드 7.
1 젠더리스 러브 스토리 동성 간의 사랑을 뜻하는 BL(Boy’s Love), GL(Girl’s Love). 여성향 웹툰 플랫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키워드다. 어쩌면 전통적인 로맨스 장르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로 인기 있는 카테고리이기도 하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서브컬처로 취급되었던 BL, GL이 메인 콘텐츠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8090 여성 독자들의 힘이 컸다. 이들은 특히 퀴어 문화에 거부감이 적은 세대인데, 1990년대부터 이어져온 아이돌 팬덤 문화의 영향이다. 아이돌 그룹 멤버들 간의 연애를 그린 소설 ‘팬픽’이 성행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나 안다(지금도 아이돌 팬덤에선 활발히 제작된다). 팬픽을 직접 생산, 소비하고 공유하는 데 능했던 소녀들은 자라서도 동성애물을 쓰고, 읽고, 그리고, 공유한다. 게다가 시간이 흘러 경제력까지 갖춘 소비자가 되면서 시장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어떤 장르보다 코어한 독자층을 가진 BL, GL은 당분간 건재할 듯 하다. 2 로맨스 판타지 로맨스는 성인 웹툰 시장에서도 만고불변의 클래식이자 흥행 공식. 하지만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이다. 현실 너머 판타지의 영역에서도 로맨스는 무섭게 세력을 확장 중이다. 로맨스 판타지(이하 ‘로판’)는 과거, 웹소설에서 주류 장르로 소비돼왔다. 중세 유럽이나 조선시대 등을 다룬 시대극인 경우가 많고, 대부분 왕자와 신데렐라형 여주가 만나 성장하는 이야기였다. 19금 작품들은 어둡거나 피폐해서 호불호가 갈렸다. 작화가 까다롭고, 호흡이 긴 탓에 웹툰으로 제작되는 데 한계가 있었는데, 최근 성인 웹툰 시장의 성장은 ‘로판’의 활로 개척에도 도움이 됐다. 알음알음 아는사람만 보던 서브컬처가 메인 플랫폼에 등장하면서 어엿한 메이저 장르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신작이 대거 등장하고, 동명의 19금 웹소설을 웹툰화하는 경우도 늘었다. 시대물 위주의 일반적인 로판 외에 현대물에 판타지 요소를 한 방울 섞은 작품도 흥행에 성공하고 있어, 앞으로 로판 시장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3. 집착광공 BL물에서 처음 등장한 후, 요즘은 이성 연애물에서도 흔히 쓰이는 남자 캐릭터의 성격 유형이다. BL에선 두 주인공 모두 남자이기 때문에 관계 시 위치와 역할에 따라 공과 수로 구분한다. 이때 공의 특징을 ‘다정공, 재벌공, 까칠공’ 같은 키워드로 표현하는데, 집착광공은 그중 하나다. 상대 남자 주인공이나 여주에게 미친 듯이 집착하는 캐릭터에게 붙는 수식어다. 특히 19금 신이 있는 성인 웹툰에서 그의 마력은 극대화된다. 온라인에는 ‘집착광공’의 수백 가지 특징이 밈처럼 떠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외모나 성격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우선 훌륭한 피지컬은 기본이다. 늘 셔츠와 수트 차림에, 메탈 시계만 차야 한다. 잘생긴데다 유능해서 젊은 나이에 본부장 직책 정도는 달고 있어야 합격. 또 차갑기 그지없는 성격에, 펜트하우스에 살아야 하며, 집착광공의 냉장고엔 물과 탄산수, 독주만 들어 있다. 노래는 가사 없는 클래식, 뉴에이지 음악만 듣고, 모두에게 냉철하고 무심해야 한다. 하지만 단 하나, 상대 캐릭터에게만큼은 열렬한 모습에 수많은 독자가 마음을 뺏기고 만다. 4. 섹스 판타지 ‘새디스틱 뷰티’ ‘오아시스’ ‘현실ㅅㅅ’은 모두 각 웹툰 플랫폼 상위 랭크에 있는 작품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섹스 취향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 BDSM(구속, 복종, 가학, 피학 등의 성향을 나타내는 말)처럼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아주 은밀하고 사적인 판타지는 이제 성인 웹툰 소재로 두루 활용되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성적 취향을 말하면 채찍을 들거나, 끈으로 묶고, 때리는 등의 퇴폐적이고 잔인한 그림을 떠올린다. 하지만 대표적인 BDSM물인 ‘모럴센스’ 같은 작품에서는 그저 때리고 맞으며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섹스 취향임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깨는 연출이나 에피소드를 풀어내기도 한다. 꼭 이렇게 극단적인 취향이 아니더라도 성인 웹툰은 독자들의 섹스 판타지를 만족시킨다. 이를테면 현실에서 만나본 적 없는 취향의 남자와 여주의 섹스 장면에서 대리만족을 느낀다든가 하는 식이다. 실제로 특히 멋진 남주가 나오는 작품의 댓글엔 ‘과몰입’한 독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5. 여공남수 여성 독자들은 여전히 러브 스토리에 열광하지만, 캐릭터 하나하나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남주는 폭력적이지 않아야 하고, 카리스마 있되 여주에겐 한없이 다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성 캐릭터는 어떨까? 이제는 ‘여공남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적극적이고 리더십 넘치는 여주가 사랑받는다. 한껏 예민하고, 화를 낼 줄 알며, 상대를 손안에 쥐고 휘두르기도 한다. 성관계 장면에선 먼저 남주를 리드하고, 섹스 토이 등을 활용해 남성의 역할도 해낸다. 과거에는 금기시되고, 감추는 것이 미덕이라 여겼던 여성의 욕망과 욕구를 전면에 드러내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독자마다 어느 정도 수위의 여성 캐릭터여야 ‘여공남수’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보호받기만 하거나 여기저기 사고만 저지르는 구태의연한 여주로는 독자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6. 여성 혐오, 멈춰! 지난해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의 네이버 웹툰 ‘헬퍼2: 킬베로스’가 논란이 된 바 있다. 성 착취, 불법 촬영, 교내 성폭행 등 여성 혐오 요소가 다수 발견됐기 때문이다. ‘청불’이라는 가림막 뒤에 숨어 여성을 철저한 도구로만 사용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네이버 웹툰과 작가는 공식 사과문을 내고 연재를 일시 중단했다. 성인 웹툰은 아니지만, 기안84의 ‘복학왕’도 주인공이 성 상납으로 취직에 성공한다는 에피소드를 업로드해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사건을 두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논쟁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여성들은 더 이상 여성 혐오 웹툰을 참지 않는다. 실제로 독자들은 작품을 선택할 때 강압적인 남성 캐릭터나 비윤리적인 성행위가 등장하는 것은 피하게 된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완벽하게 묘사되는 여성 캐릭터 또한 외모지상주의를 심화시킨다는 주장도 나왔다. 소비자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는 요즘, 비단 웹툰만이 아니라 콘텐츠 시장 전반이 혐오 표현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장착해야 한다. 7. 서사 서사가 있는가. 여성 타깃 19금 웹툰이 남성향 작품과 가장 대비되는 지점이다. ‘이번 화에 19금 신이 나오는가’ ‘농도는 얼마나 짙은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독자들의 관심사 중 하나다. 하지만 여성을 위한 로맨스에서 독자를 더 몰입하게 하려면 인물들 간의 서사, 감정선, 관계성을 설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가끔은 두 사람이 닿을 듯하다가도 멀어지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키포인트. 이들이 어떻게 몸을 섞게 됐는지에 대한 설득이 없으면 공감을 얻지 못한다. 마침내 거사를 치르게 되더라도 등 근육, 두 사람이 맞잡은 손, 허리 라인 등을 디테일하게 표현해내는 연출이 보는 이들의 흥분도를 높인다. 때로는 직접적인 정사 장면 없이도 보는 이를 긴장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성향 세계에선 그저 자극적인 것 말고,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 끗의 서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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