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할당제가 아니라 성별할당제입니다

성별할당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물론 특정 성이라서 차별받지 않는 그날이 오면.
BY 에디터 송혜민 | 2021.11.23
1886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은 남성의 전유물이던 교육을 여성들에게 선물했다. 당시 이화학당에선 체조도 가르쳤는데 손을 번쩍 들고 양쪽 다리를 벌리며 뜀박질을 하는 동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체조 과목이 사회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엄격한 집안에서는 여성의 발걸음조차 신중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시절이라, 온몸으로 펄쩍펄쩍 뛰는 모양새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거다. 학부모들은 하인을 보내 딸을 집으로 데려오기에 바빴고, 체조하는 딸 때문에 가문이 망신을 당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일부에선 ‘이화학당에 다닌 여자는 며느리 삼지 않겠다’는 풍조가 일기도 했단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생긴 여자학교는 이런 식의 온갖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됐다. 20세기 초 영국의 서프러제트는 어땠나. 남성이 아니라서 투표할 수 없는 세상을 바꾸고자 거리로 나선 여성들은 시끄럽고 공격적이라는 이유로 고문당하고 감옥에 갔다. 21세 이상 모든 여성이 투표권을 얻기까지는 그 이후로도 16년이 더 걸렸다. 여자도 학교를 다니고 투표를 하는 지금이야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 불편하고, 꺼림칙하고, 불손한 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누구도 당시의 여자들이 남자보다 능력이 떨어지거나 의지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2021년형 여성운동사의 중심에 있다. 성별할당제에 대한 얘기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야당 경선 후보 정치인들은 공통적으로 여성가족부와 여성할당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135년 전의 이화학당이 그랬듯,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주고자 시작된 여성할당제는 시작도 하기 전에 비난에 직면했다.
여성할당제라는 허상
2022년 8월 5일부터 개정된 자본시장법에 의해 자산 총액 2조 이상의 상장 법인엔 이사회 전원을 ‘특정 성’으로 구성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사회의 성별 구성에 관한 특례 조항’이 의무 적용된다. ‘자산 총액 2조원 이상’이라는 척도는 지난 2000년 증권거래법에서 정한 대형 상장 법인의 기준을 따른다. ‘이사회의 성별 구성에 관한 특례 조항’은 2020년 8월 5일 개정안을 시행하고, 2년간의 유예기간을 뒀다. 국내 상장기업 이사회의 대부분이 남성 중심이다. 바꿔 말하면 이 제도는 여성 임원을 선임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해당되는 152개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지난 8월 5일 기준 5.7%다. 전년 대비 1.2% 증가한 수치지만 아직도 여성 임원이 1명도 없는 기업이 34개에 달한다. 민간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성별 정책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공공 부문에서는 일부 시행된 바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공무원 양성평등 채용목표제를 보자. 공공 부문의 성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어느 한쪽 성별의 합격자가 전체의 70%를 넘지 않도록 채용 비율을 조절하게 되어 있다. 물론 1996년 처음 시행될 당시 취지는 여성들의 공직 진출을 늘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성을 위한 정책이냐고 묻는다면 답하기 애매하다. 오히려 남성들이 혜택을 보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5년부터 5년간 이 제도로 추가 합격한 국가직, 지방직 공무원의 75.7%(1204명)가 남성이다. 제도의 출발과는 별개로 더 이상 여성을 위한 정책이라 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렇다면 ‘여성할당제’가 아니라 ‘성별할당제’로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여전히 여성이 일하기 어려운 사회로 평가받는다. 영국 시사주간지<이코노미스트>가 직장 내 여성 차별 수준을 지표화한 ‘유리천장지수(Glass-ceiling Index)’를 발표했는데, 2020년 한국이 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를 차지했다. 성별 간 임금 격차, 간부직 내 여성 비율, 여성과 남성의 육아휴직, 의회 내 여성 비율 등 10가지 지표를 평가한 수치다. 혹자는 2021년 한국을 두고 ‘여성 우위의 시대’라 말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어보인다.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
여성들도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내 합격이, 승진이, 성과가 할당제 덕을 본 거라는 편견이 싫어서다. 강제로 여성 임원을 확대하면서 능력 없는 인물이 혜택을 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최근 논란의 대상이 됐던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임명 문제를 봐도 알 수 있다. 커리어 내내 최초, 최연소 타이틀과 함께한 통신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면서 임명 전부터 자격 논란과 정권의 수혜자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 임원 자리에 오른 여성들은 기계적 평등을 통해서라도 다음 세대를 위한 길을 터놓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세계여성이사협회 이복실 한국지부 회장은 “유리 천장은 위에서 깨져야 하지만, 아래를 위해 깨줘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고 말했다. 여성 후배들이 반드시 겪을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거다. 성별할당제의 궁극적인 가치는 여기에 있다. 철저한 능력 위주의 고용과 승진은 기업의 의사 결정 과정이 평등할 때 완성된다. 견고한 남성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쉽게 묻힌다. 보통의 여성에겐 임신과 출산, 육아 등 커리어 단절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장애물이 들이닥친다. 의지로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다. 같은 여자라도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데, 다른 성별이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기로에 놓인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고, 길을 제시해주는 선배가 꼭 필요하다. 기업의 의사 결정 과정에 직접 관여하는 여성이 느는 데서부터 인식 개선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더 다양한 목소리를 품는 기업은 경영 성과에서도 나은 결과를 보였다. 글로벌 전략 컨설팅 기업 매킨지는 지난 2018년 12개국, 1000여 개 기업을 분석해 이런 결론을 내놨다. ‘이사회의 성별이 다양한 기업일수록 남성 비중이 높은 기업보다 영업이익이 21% 높다.’ 회계법인 삼정KPMG에서 최초의 여성 임원, 여성 부대표 타이틀을 가진 서지희 부대표는 한 인터뷰를 통해 “이 문제는 젠더보다 다양성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선 30% 이상의 다양성이 보장돼야 한다. 노르웨이는 40%, 독일은 30% 이상의 여성 임원 비율을 법으로 정했다”고 덧붙였다. 2017년, 이화여대의 첫 직선제 총장으로 취임한 김혜숙 총장은 이런 말을 했다. “이화여대는 소멸을 향해 달린다.” 결국은 사라지는 게 대학의 목표라니. 아이러니하고도 슬프게 들리지만 뜻만은 명확하다. 교육으로 차별받는 여성이 사라지는 시대가 오면, 여자대학교의 존재 이유도 사라진다는 것. 그런 의미에선 성별할당제도 여대와 운명공동체다. 고용과 승진, 출세의 기회를 동등하게 부여받는 시대가 오고, 성별할당제 또한 소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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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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