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피어나는 이세영

단아하고 기품 있는 붉은 단상의 끝에서 말갛고 해사한, 단단하게 자라난 배우 이세영을 바라본다.
BY 에디터 박소현 | 2021.11.25
블라우스 YCH.
날이 차다. 월동준비는 하고 있나? 배우 이세영으로는 완벽하게 대비했다. 야외 촬영에 대비해 수면 양말과 내의, 패딩 점퍼, 핫팩, 한복 치마 아래에 입을 겹바지까지 단단하게 준비했다. 마음이 든든하다. 그에 비하면 사람 이세영은 집도, 촬영장도 따뜻해서 추위가 왔는지도 몰랐다. 핫팩 스물다섯 개를 온몸에 빈틈없이 붙이는 노하우를 지녔기 때문일까?(웃음) 역시 사극 경력의 스킬이 있나 보다. 물론, 그간 쌓아온 기술이 있다(웃음). 붙이는 핫팩과 흔드는 핫팩 다 소중하지만 특히 흔드는 핫팩은 군용으로 나온 제품이 좋다는 걸 알 정도는 된다. MBC 사극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한 주 밀려 11월 12일 첫 방송됐다. 열심히 준비한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는 기분은? 한 주가 밀려 아쉽지만 또 긴장되고 설레면서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것 같다. 촬영장 분위기는 어떤가? 화목하고 유쾌하고 활기차다. 더운 계절과 추운 계절을 함께 지내면서 촬영하다 보면, 전쟁 최전방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겪은 동지애를 넘어 짙은 가족애를 느끼게 된다. 상대 역인 준호 씨와는 눈빛만 봐도 캐릭터의 감정과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는 사이가 됐다. 발맞춰서 종영까지 즐겁게 헤쳐나가려 한다.
원피스 손정완.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지키고자한 궁녀와 사랑보다 나라가 우선이었던 제왕의 애절한 궁중 로맨스를 그린다. 여기서 주인공 ‘성덕임’은 역사 속 실존 인물이다. 조선시대 빈들 가운데 이름을 남긴 사람이 단 두 사람, 장옥정(장희빈)과 성덕임(의빈)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당신이 바라본 그녀는 어떤 인물인가? 역사 속 인물이라 그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이 드라마가 어떻게 그녀를 바라보고 그려내는지의 관점이 중요하다. 드라마 속 ‘덕임’은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 하는 친구다. 동무들과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고, 책을 필사해 읽어주면서 기뻐하는 반응에 감동받는 자신의 소박한 일상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다 사건에 얽히면서 극이 전개된다. ‘왕은 궁녀를 사랑했는데, 그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 이것이 우리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정조의 애절한 사랑은 의빈의 절절한 묘비석 글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내린 두 번의 승은을 거절한 뒤, 비로소 이뤄진다. 15년이란 세월도 깊다. 덕임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은 없었나?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운 시대에 자기 의지를 드러내곤 했으니 말이다. ‘왕을 사랑했지만, 왜 밀어냈을까? 잃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까? 왜?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라고 의아했던 부분은 촬영을 시작한 뒤, 그녀의 마음에 동화되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드라마 원작인 동명의 소설에서는 “다음 생에 만나거든, 아는 체도 하지 마옵소서”란 문장이 나온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글귀다. 그런 덕임을 생각하면 슬퍼서 가슴이 아린다. 당신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이 연상된다. 이번 드라마에서 기대하는 바가 있나? 매 작품을 통해 새로운 배우들과 제작진, 그리고 새로운 시청자들을 만난다. 이 만남이 어떨지 기대된다. 작품이 끝나면 배우에겐 캐릭터가 남는다. 물론 캐릭터가 돋보이기보다 작품에 녹아드는 걸 중요하게 여기지만, 내게 남을 덕임이 기대되고 또 아름답게 남길 소망한다. 이제까진 주로 성장하는 캐릭터들을 시도해왔는데 그녀는 역사 속 실존 인물이라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르다. 그녀와의 만남이 어떻게 남을지 나도 많이 궁금하다.
원피스와 코트 모두 코치, 슈즈 지미추.
배역뿐 아니라 바뀌는 환경도 기대된다고 했는데, 문득 매번 이직하는 직장인의 고충이 대입된다. 여기서 생기는 피로는 없나? 내겐 자연스러운 삶이고, 생활이다(웃음). 작품이 시작되면 촬영장의 수많은 사람을 가족보다 자주 보게 된다. 이 시간이 편하고 즐겁지 않으면 작품의 내용과 질을 떠나 7~8개월간 서로 불편해지고 재미가 없어지니까, 다 함께 즐겁기 위해 내가 먼저 다가가서 친해지려 노력한다. 다행히 인복이 있어 이제껏 좋은 사람들만 만났다. 팬데믹 시기에 고생하는 와중에도 다들 무사하고 건강하게 보냈으니 운도 좋다. ‘짬에서 오는 바이브’란 밈이 떠오른다. 데뷔 26년 차, 어마어마한 이 시간을 실감할 때는 언제인가? 어느 순간부터 숫자는 잊은 지 오래다. 한 가지 일을 오래 한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이 더 쉽거나 편해지진 않더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인물을 연구해 표현하다 보면 매번 리셋되어 처음부터 시작되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나를 사랑해주는 분들, 가족과 친구들이 변함없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 속에서 한결같은 나로 존재하고 싶었는데, 요즘은 나도 변했다는 걸 느끼곤 한다.
재킷과 니트, 바라클라바 모두 미우미우.
사람은 컵에 든 물이 아니니까, 변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언제 그 변화를 느끼나? 예전에는 사인하면서 어린 친구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세요’ 이런 말을 썼는데, 요즘은 문득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 생각이 앞선다. 잠깐 연예인을 만나는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권하면 오히려 힘이 빠지겠다 싶다. 그래서 ‘건강하세요’란 메시지를 쓴다. 당신의 심신이 편안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일례로, 나이가 들수록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많다. 눈에 보이는 선과 악도 단편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보다 시야가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 좋은 쪽으로 변하면서 발전하고 싶다. 드라마 <카이로스> <메모리스트> <의사요한> <왕이 된 남자> <주말 사용 설명서> <화유기> <최고의 한방> 등 전작에서는 치열하게 고군분투하는 캐릭터에게 마음이 간다고 밝혔다. 그러한 캐릭터들을 거치면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는 것도 느끼나?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성장하는 절박한 인물에게 매력을 느꼈다. 어딘가 허점 있는 인물들이 기어코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대리만족의 쾌감을 느끼곤 했다. 나 역시 20대 초중반은 치열하고 절박했다. 울 시간이 아까워서 눈물을 참았을 만큼 지치고 힘들었던 시기다. 20대 후반에 들어서 하고 싶었던 작품들을 통해 마음껏 연기하면서 평온을 찾았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평범하고 소소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려는 인물에게 눈길이 간다. 우리도 각자의 현실에서 가열차지만 소소한 보통의 삶을 살고 있으니까. 덕임도 그래서 당신과 연이 닿았나 보다. 그런 덕임이 와주어서 고마울 뿐이다(웃음).
원피스 손정완.
축구, 서예, 승마, 만화 등 다채로운 취미부자 집돌이 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는가? 관심사가 얇지만 드넓다. 배우들 사이에서는 만화 표현처럼 연기하면 잘하는 연기란 말이 있어서 작품을 할 때마다 집중해서 만화를 보곤 한다. 요즘은 복싱 만화 <더 파이팅>에 푹 빠졌다. 내 머릿속에선 이미 슉슉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페더급 프로 복싱 선수다. 촬영이 끝나면 축구장과 승마장을 누비며 서예에 정진할 계획이었는데, 복싱까지 추가되어 벌써부터 마음이 꽤 바빠졌다. 인터뷰를 하면서 건강한 에너지가 전염되는 기분이 든다.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깨달은 달관자의 여운도 느껴진다. 자신을 놓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승부욕이 강한 편이다보니, 어느 순간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건 창피한 일이란 걸 깨달았다.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선 실패도, 상처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난 연기를 평생의 직업이라 여긴다. 비난과 비판이 나 자체를 부정한다고 여기면 진짜 힘든 일이 되어버리지만, 직장에서 일을 못한다는 지적을 받으면 더 노력하겠다고 받아들일 수 있잖나? 좋은 반응은 패스해도 나쁜 반응은 쏙쏙 골라 본다. 대신 고쳐야 할 팩트는 새겨놓고, 그 순간의 감정은 바로 털어낸다. 무엇보다 매사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심리학에는 회복 탄력성이란 용어가 있다. 크고 작은 역경과 시련과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성질을 뜻하는데, 당신은 회복탄력성이 탄탄한 사람 같다. 그것도 지기 싫기 때문이다(웃음). 원색적인 비난을 받아 상처받으면 세상에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칠 점은 고치고, 고치지 못하는 건 받아들이고, 아닌 것은 흘려보내면 된다. 더 잘 버텨서 즐겁게 살아남고 싶다.
톱과 팬츠, 워머 모두 잉크.
최근 들어 자기 자신에 대해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나? 게으르고 부지런하다. 에너지를 쓸 때 몰아서 쓰고, 나머지는 방전된 상태랄까? 뛰어난 운동선수는 컨디션과 상관없이 일정한 루틴으로 에너지를 쓴다고 하던데, 그 점이 부럽다. 에너지를 몰아서 쓰는 사람들의 특성은 자신을 끝까지 태워서 얻는 성취감에 중독되기 때문이라더라. 그런 것 같다! 난 그렇게 얻는 성취감이 좋다. 벌써 12월이다. 2021년 달력의 마지막 날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방콕이라고, 내 집에서 가장 안락한 장소로 떠날 계획이다. 탁 트인 전망에 연락이 닿지 않는 외딴섬도 좋겠지만, 올해는 ‘방에서 콕’ 뒹굴뒹굴하고 싶다. 어색하지만 우린 2022년을 맞이해야 한다. 어떤 내일을 그리나? 여전히 게으르지만, 하고 싶은 건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드는 내가 좋다. 또 열심히 안 하는 나도 좋다. 돌이켜봤을 때 더 좋아지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아주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소중한 하루하루가 되길 바란다.

사진

주용균

스타일리스트

최혜련(민트 컨디션)

메이크업

강여진(정샘물인스피레이션 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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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정(프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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