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감독으로 산다는 것
황상준 감독에게 음악이란 작품과 관객 사이의 무한한 소통이다.
BY 에디터 류현경 | 2022.01.12“한번은 연출 제의가 들어온 적이 있는데, 고민을 좀 했어요. 정말로 만에 하나 내가 잘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 그게 성공했다고 치면, 나는 다시 음악감독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후에 몇 편이나 더 할 수 있을까? 그때 생각했죠. 나는 그냥 음악감독으로서 더 많은 작품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요.”
어떤 기억은 음악으로 불멸의 생명을 얻는다. 당장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직후라면 기억나는 장면을 수십 개는 꼽아가며 하나하나 되짚을 수 있겠으나, 사실상 한 두 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빠른 속도로 잊힌다. 종종 생명이 긴 것은 오히려 음악 쪽이다. 실제 10년 전, 20년 전에 본 영화나 드라마라도 명징한 OST가 흐르면 그때 그 장면이 생생하게 눈앞을 스칠 때가 있다. 멜로디 한 줄, 가사 한 마디가 빠른 속도로 옛 시간을 건드리며 기억을 환기한다. 그날의 공기, 솜털같이 가느다란 정서까지도 전부 우리 앞에 데려다놓는다.
영상이 희미해질수록 신기할 정도로 음악은 점점 더 힘이 세진다. 황상준 감독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래서 어느 때보다 설레었다. 2000년 <단적비연수> 이후 20여 년간 수 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우리에게 ‘각인’시켜온 음악감독. <식객> <해적: 바다로 간 산적> <히말라야> <검사외전> <공조> 등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음악만큼은 끝내준다”고 평가받던 무수한 OST가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그 중 가장 최신작이 <인간수업>에 이어 김진민 감독과 함께한 두 번째 넷플릭스 드라마 <마이 네임>이다.

음악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법
사실 <마이 네임>은 파격으로 가득했던 <인간수업>에 비해 장르적 특성이 짙은 작품이다. 접근하는 시선과 호흡이 독특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언더커버와 복수, 누아르의 합이 워낙 강하다. 황상준 감독 역시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반신반의했다.
다만 그는 김진민 감독을 믿었다. 2005년 첫 드라마인 <신돈>부터 <개와 늑대의 시간> <달콤한 인생> <로드 넘버원> <무신> 그리고 <인간수업>과 <마이 네임>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서로의 필모그래피 속 대부분의 드라마를 함께했다. 그러니까 의견을 나누고 고민하고 함께 작업한 세월이 16년에 이른다. 게다가 김진민 감독은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감을 드러내왔다. 최근 한 인터뷰를 통해 “황 감독이 맞다고 하면 그냥 따라간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젠 서로의 스타일을 잘 아니까요. 저는 음악 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영상을 모니터링하며 편집이나 인물 역할이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보여지는 부분, 혹은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하거든요. 그 말을 잘 경청해주죠. 제 의견을 반영해 편집하거나 방향성을 틀기도 하고요.”
물론 그의 주된 의견은 음악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마이 네임> 속 엔딩 테마가 중간에 한 회에서만 갑자기 달라지는 것. 많은 드라마 팬들이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는 6부 엔딩 속 절묘한 서사와 음악의 조화는 황상준 감독이 고집스럽게 밀어붙인 결과물이다.
“그때가 여주인공이 배신을 당해 누가 범인인지 정확하게 알 때였어요. 음악을 바꿔 넣었더니 감독님에게 전화가 오더라고요. 이렇게 가도 되냐고. 너무 세고 독특해 보였나 봐요. 그런데 저는 그 순간, 여주인공이 ‘능동적으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에 집중했거든요. 자신의 과거, 자기 몸에 새겨진 흔적을 지워버리는 행위 자체가 ‘이제부터 멋있게 싸울 거야!’ 이런 느낌이 아니라 ‘옳은 선택이든 잘못된 선택이든 내가 한다’라는 의미로 전해졌달까요. 매우 능동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무조건 이 음악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어요. 결국 제 확신을 감독님이 믿어준 셈이에요.”
물론 연출가와 음악감독의 논의가 늘 이렇게 순탄하지만은 않다. 서로 원하는 방향, 바라보는 방향, 옳다고 믿는 방향이 다를 경우가 부지기수다. “감독들은 본인이 처음 시나리오를 썼을 때의 생각을 접기가 쉽지 않아요. 그렇지만 천천히, 조금씩 바뀔 수 있죠. 어딘가에 변곡점도 있을 테고, 서로 해석하거나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정리되는 부분도 있을 테고요. 그런 뒤 장점만 추리는 거예요. 예를 들면 감독은 촬영할 때 배우들에게 원하는 방향으로 디렉션을 주잖아요.
그런데 막상 찍어온 영상에선 그 의도가 잘 전해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죠. 이런 부분을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는 데가 음악뿐이고요. 그럼 그 지점에서 어떻게든 감독의 의도대로 만들어가는 게 맞는 방향일까? 아니면 관객들은 다른 생각도 할 수 있게끔 약간 사고를 열어주는 게 맞을까?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한 상황인 거예요. 감독에게 100% 확신이 있다면 그 길로 가는데, 만약 잘못된 방향을 택한다면 제가 계속 얘기해주는 거고요.”
그런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그는 끊임없이 편협해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경주마처럼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사고를 경계하며 후배들에게도 늘 “일반적이고 윤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음악감독을 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이 업계는 관계의 폭도 좁고, 만나는 사람들도 개성이 강하잖아요. 작가들, 감독들, 다 독특한 사람일 수밖에 없죠. 자칫 잘못하면 편협해지기 쉬워요. 그래서 저는 평소 아이들을 키우는 평범한 아빠로 살려고 노력해요. 동네의 다른 아빠들과도 자주 만나고, 중요한 뉴스는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챙겨 보고 있어요. 그게 저에게 주는 매일의 숙제예요.”
결국은 문을 열어놔야 한다는 것,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는 것, 평범한 보통 사람의 감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음악감독으로서 늘 작품과 관객 사이에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너무 한쪽으로만 쏠려 있으면 기준점이 사라지잖아요. 내가 확신이 없으니 감독과 이야기할 때도 힘들어지고요. 그러니까 그런 여러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음악감독의 중요한 포지션인 것 같아요.”
황상준 감독이 말하는 음악이란 미술과 비슷하다. 같은 영상이라도 음악을 어떻게 색칠하느냐에 따라 전체 이미지가 달라진다. 실제 <마이 네임> OST가 독특한 지점도 여기에 있다. 보통의 드라마에선 잘 들어볼 수 없는 종류의 음악들, 과연 누아르 장르와 어울릴지 의심스러운 테마들이 구석구석 서사와 감정의 흐름을 절묘하게 이끈다. 곡의 배치, 치고 빠지는 타이밍도 치밀하다.
“계속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기 위해선 호흡 조절이 필요해요. 너무 당겼다 조였다 하면 오히려 지쳐서 못 보거든요. 때론 느슨하게 떨어뜨리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고요. 실제로 무척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저는 그게 관객과의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늘 고민이 많지만, 음악감독이 해야 할 가장 큰 일 중 하나죠.”
여전히 치열한 거장의 세계
개인적으로 황상준 감독의 최근작을 보며 느낀 감상은 ‘젊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음악을 해왔는데도, 이미 거장이라 불리는데도 이 사람은 여전히 젊구나, 여전히 치열하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다만 그는 스물아홉 살에 음악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계속 난간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여기서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인생이 끝날 것만 같았고, 그래서 더 독하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일했다.
“그러다 보니 기댈 데가 없더라고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지, 내 음악이 어떤지 물어볼 사람도 없고요. 근데 가족이 생기고 아이들도 생기면서 점점 바뀌었어요. 두 아들이 대여섯 살 때부터 제가 작업한 음악을 들려주고 그 반응을 지켜봤죠. <해적: 바다로 간 산적> 때도 그랬어요. 사실 ‘아빠 음악 괜찮아?’ 물어보면 다들 좋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기억나는 멜로디를 불러보라니까 못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부분을 다시 작업했어요. 애들은 본능적이라 정말 좋으면 자기가 기억에 남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든요. 지금은 좀 컸는데, 둘 다 정말 다양하게 음악을 들어요. 일부러 챙겨 듣지 않으면 접하기 어려운 음악을 제게 들려주기도 하죠. 저한테는 좋은 음악 동지들인 셈이에요.”
실제로 두 아들은 그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내부자들이다. 끊임없이 젊은 감각,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심어주고 모니터링도 꽤 신랄하게 해준다. 실제 <마이 네임>의 타이틀곡이 지금의 ‘돌파하는 듯한’ 느낌으로 완성된 것도 둘째 아들의 “좀 지겨운 것 같은데?”라는 피드백 덕분이다. <마이 네임>이 공개된 지 벌써 두 달. 다행히 그의 새로운 작업을 만나볼 날도 멀진 않았다.
우선 1월에 개봉하는 영화는 <특송>과 <해적: 도깨비 깃발>이다. 전작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 이어 두 번째 시리즈에서도 음악감독을 맡았는데, 전작에서 쓰인 좋은 테마들을 활용하되 좀 더 새롭게, 좀 더 좋은 소리로 바꾸는 작업이 이뤄졌다. 현재는 김진황 감독과 <야행>을 작업 중이고, 곧 이석훈 감독의 <공조2: 인터내셔날>과 이철하 감독의 10부작 시트콤 <청와대 사람들>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후 김진민 감독의 차기작이자 새로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종말의 바보>에도 합류한다. 이미 2022년 스케줄이 꽉 찼다는 이야기다.
“특별한 목표는 없고, 그냥 지금처럼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해야죠. 기관차가 한번 멈추면 그걸로 끝이지 선회하지는 않잖아요. 그때까지는 계속 재미있게 일하고 싶어요.” 드라마 작업을 병행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의 주된 분야는 영화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미치도록 좋아했고, 음악감독으로 입지를 굳히면서도 대학원에서 연출 공부까지 마쳤으며, 단편영화 <가장 아름다운>으로 미쟝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황상준 감독에게 대체 영화 작업의 매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무엇이 그를 아직도 이렇게 치열하게 만드는지, 어떻게 20년 넘도록 해온 일이 여전히 재미있을 수 있는지.
“초등학생 때인가, 형이랑 서울 큰집에 와서 버스를 1시간쯤 타고 극장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본 영화가 <록키3>였죠. 물론 영화는 원래 살던 마산에서도 많이 봤지만, 아마 평소 가던 곳보다는 훨씬 큰 극장이었을 거예요. 처음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커다란 스크린과 사운드, 숨어 있는 사람들의 공기며 기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때의 기억으로 지금까지 영화음악을 하는 것 같아요. 지금도 제가 작업한 작품을 극장에서 혼자 보고 있으면 그때 그 느낌이 전율처럼 전해지거든요. 영화는 저에게 그런 존재예요. 그래서 계속 해야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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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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