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계절
대선을 앞두고 날카로운 풍자, 시의적 메시지로 무장한 정치 소재 영화가 연일 쏟아져 나온다.
BY 에디터 류현경 | 2022.02.28
5년에 한 번, 우리가 사는 세상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싸움판이 펼쳐진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고학력 인사들이 전투력을 풀충전해 서로의 치부를 들추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낸다. 마치 바둑판 위처럼 세계가 흑과 백으로 갈라지는 한편, 어제의 적이 오늘의 둘도 없는 지기로 돌변하는 일도 다반사다.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 그리고 이 시기만 되면 어김없이 주목받는 영화 장르가 있으니, 정치인 혹은 선거를 소재로 한 이른바 정치 풍자 영화들이다. 물론 극영화의 탄생 이래 정치는 꾸준히 중요한 소재로 활용돼왔다.
오히려 국내 정치극의 역사가 유난히 짧은 편인데, 일단 1980년대까지는 혹독한 군부독재의 시기였고 민주화 이후에도 한동안 대통령의 존재를 작품 속에 언급하는 일은 금기시되었던 탓이다. 1991년 강우석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치 고발의 길을 홀로 걸었을 뿐, 사실상 영화가 본격적으로 현실 정치와 맞물리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이후부터라고 봐야 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화려한 휴가>다.
2007년 제17대 대선을 5개월 앞둔 여름,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첨예한 소재를 안고 등장한 이 영화는 무려 685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5·18민주화운동은 이후에도 <26년> <택시운전사> 등의 흥행 영화로 재현됐는데, 재미있는 건 두 작품 모두 대선이 있던 해에 개봉했다는 사실이다.
<26년>은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사건을 담은 <남영동 1985>와 함께 제18대 대선에 앞서 등장했고, <택시운전사>는 6월 민주항쟁을 다룬 <1987>, 서울시장선거를 소재로 한 <특별시민>, 검찰과 정치권의 유착 관계를 그려낸 <더 킹>과 함께 제19대 대선 전후 공개된 것. 물론 이들 영화가 꼭 어떤 시기에 맞춰 제작된 것이라 단정하긴 어렵다.
게다가 정치나 선거는 특별한 시의성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다. 매 순간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승부, 온갖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순도 100% 현실 싸움판의 재미를 영화계가 놓칠 리 없으니까. 다만 이들 영화의 공개 시점이 대선과 맞물리는 순간, 관객의 몰입도가 커지고 어떤 메시지든 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중으로 하여금 정치를 둘러싼 여러 사건에 대해 인지시키거나 투표 참여를 독려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여러 관계자들의 말처럼, 대선 시즌에는 문화 콘텐츠 하나하나가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올해도 대선 열차에 올라탄 대한민국엔 연일 선거 콘텐츠가 쏟아지는 중이다. 소위 ‘정치 특수’ 시즌, 그 포문을 연 영화는 1월 26일 개봉하는 <킹메이커>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정치인과 이름도, 존재도 감춰진 선거 전략가의 대선 준비 과정을 그린 작품인데, 코로나19로 몇 차례나 개봉을 미루다가 제20대 대선을 한달여 앞두고 간신히 개봉 날짜를 확정 지었다. 작금의 정치판이 어지간한 드라마나 코미디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코미디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이미 안팎으로 입소문을 타며 호평받은 만큼 영화에 대한 대중의 기대치는 높다.
설경구와 이선균 외에도 유재명, 조우진, 박인환 등 탄탄한 배우들이 총출동했다는 점,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선거판의 여우’라 불리던 그의 참모 엄창록의 실화를 모티프로 삼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3전4기 대권 도전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 곧 다음 타자로 나설 예정이고, 민주화 운동가 문익환 목사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늦봄2020>도 2월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 크랭크업한 <정직한 후보>의 후속작 역시 현재 대기 중이다.
사실 조심성 많은 극장가보다 대선 시국에 좀 더 기민하고 적극적으로 나선 건 OTT 쪽이다. 지난해 말, 국내 OTT 플랫폼 웨이브가 오리지널 시리즈로 내놓은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가 좋은 예다. 문화체육관광부를 무대로 한 이 정치 블랙코미디 드라마는 공개 첫날 웨이브 신규 시청자 유입 및 시청 시간 1위를 기록했고, 지금도 시즌2 요청이 쇄도할 정도로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깨알같은 웃음 너머 대한민국의 현실 정치 지형을 충실히 그려낸 한편, 관객이 정치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올 상반기 OTT를 통해 방영될 이철하 감독의 정치 시트콤 <청와대 사람들>도 기대작으로 꼽힌다. 차인표가 주연을 맡아 갱년기와 레임덕이 찾아온 대통령의 위기 탈출기를 그려낼 예정인데, 일단 제작사가 를 만든 에이스토리인 것만 봐도 이 작품의 공격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OTT의 도전이 유독 화끈한 이유는 지상파나 영화계에 비해 제약이 적고, 정치적 부담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다만, 범람하는 정치 콘텐츠의 물결 속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 어떤 태도로 바라볼 것인지는 철저히 관객의 몫이다. 영화와 드라마 장르가 시대를 반영하든 혹은 조롱하든, 우리로 하여금 불편하고 피로해 자꾸만 외면하고 싶은 정치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면 그것만으로 정치극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정치극의 정석
적절한 정치 소재는 시기와 무관하게 늘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장르의 본질을 파고들며 다양한 현실 감각으로 우리를 사유하게 한 정치 소재 영화들.

변호인
2013년 개봉한 <변호인>은 기대만큼 우려의 목소리도 높던 작품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했기 때문인데, 개봉 후에도 이 영화의 성취를 치켜세우거나 깎아내리려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 단, 정치적으로 어떤 입장이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의 보편성에 대한 통찰과 배우 송강호의 뜨거운 호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듯. 1137만 관객을 동원해 역대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 13위에 올라 있다.

특별시민
이미지 관리에 철저한 권력지향적 정치인이 헌정 사상 최초의 3선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다. 충분히 예측 가능한 난장판이지만, 이를 우직하게 밀어붙여 아주 디테일하게 펼쳐내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다. 2017년 4월 제19대 대선을 불과 10여 일 앞두고 개봉해, 대한민국 정치 ‘쇼’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 배우 최민식과 곽도원의 숨 막히는 앙상블이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남한산성
원작 소설의 독자라면 이 ‘말’뿐인 이야기가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 의심부터 들었을 터이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1636년 병자호란 배경이고, 그 소재도 서늘하디서늘한 김훈의 문장이니까. 황동혁 감독의 선택은 일체의 변주 없이 사건과 인물, 원작의 정서까지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기는 것. 덕분에 두 노련한 정치가의 ‘신념 전쟁’은 그 어떤 전투보다 치열하고 예리하며 긴 여운을 남긴다.

남산의 부장들
1979년 10월 26일,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약 40일간 벌어진 권력자들의 암투를 극으로 재구성한 작품. 민감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했지만 어떤 정치적 판단 없이 캐릭터의 심리를 조율함으로써 누아르와 스릴러 장르의 쾌감을 살려냈다. 팬데믹 선언 직전인 2020년 1월 개봉해 475만 관객을 동원하며 코로나19 이후 최대 흥행작으로 기록되었다.
일러스트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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