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담의 무수한 시작

상처와 미스터리로 가득했던 <공작도시> 속 이설의 서사는 막 끝났지만, 배우 이이담의 연기 인생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BY 에디터 류현경 | 2022.04.08
오버사이즈 재킷, 언밸런스 니트 톱, 데님 스커트, 슈즈 모두 드래.
배우 이이담을 만난 날은 JTBC 드라마 <공작도시>의 종영일이었다. 그는 생애 첫 드라마 주연작을 통해 도무지 신인답지 않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고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시청자들에게 오롯이 각인시켰다. 첫 화보 촬영, 첫 인터뷰, 눈앞의 모든 시작을 마치 드라마 속 김이설처럼 두려움 없이 마주하며 ‘좋은 배우’ ‘좋은 어른’에 대한 열망을 이야기했다.
니트 카디건 드래, 로우라이즈 레이어드 데님 팬츠 막스마라, 슈즈 레이첼콕스.
데뷔의 순간 사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하고 싶은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연극부 동아리 활동을 통해 연기를 처음 접했는데, 친구들과 같은 대본으로 함께 연습하고 또 무대에 오르는 작업이 너무 재미있었다. 열정 넘치는 친구들을 보며 자극도 많이 받았고 그런 순간들이 좋아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 후엔 혼자 프로필 돌리며 단역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당시 지원한 오디션은 떨어졌지만 그 때 만난 분이 다른 오디션을 추천해주셔서 결국 허진호 감독님의 단편영화인 <두 개의 빛: 릴루미노>를 찍게 됐다. 점점 좁혀지는 간극 원래 말이나 성격이 늘 하이텐션이다. 낯가림이 심하긴 하지만 좀 친해지고 나면 지나치게 밝고 시끄럽고, 주변에서 제어가 안 된다고 말할 정도로 까불거리며 장난도 잘 치는 편이다. 그런데 <이매몽>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공작도시> 같은 작품을 통해 뭔가 사연 있고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캐릭터들을 계속 접하면서 나도 모르게 성격이 차분해졌나 보다. 어떻게 보면 철이 드는 걸 수도 있고, 연기해온 캐릭터들을 조금씩 축적하게 된 걸 수도 있고. 그래선지 요즘은 재미가 없어졌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무거운 캐릭터를 연기할 때 인물이 놓여 있는 상황이 정확히 어떤 것이고 그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오래 고민한다. 예를 들어 앞선 역할들은 상황이 힘들어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인물이었다면 <공작도시> 속 이설은 아예 상황을 마주 보며 돌파하는 성격이라 그런 부분에 초점을 두기도 했다. 다만, 캐릭터가 나를 좌지우지하지 않도록 최대한 밸런스를 찾는 편이다. 촬영이 없을 땐 주로 대본을 읽지만 한참 대본에 몰입하다가도 잠시 쉬는 짬을 내어 다른 작품, 다른 연기들을 찾아본다. 물론 무척 힘든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날엔 아예 스스로를 던져버리는 게 좋을 때도 있다. 그래야 더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다면 말이다. 첫 드라마 주연이라는 부담감 <공작도시>는 오디션 기간부터 짧지 않았다. 한 달이 넘도록 일주일에 한 번씩 감독님과 만났다. 떨어졌구나 생각했을 때쯤 연락이 왔던 것 같다. 그만큼 감독님도 고민을 많이 하셨고, 스스로도 자신감이 100%는 아니었다. 내가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처음 캐스팅이 결정됐을 때도 큰일이다 싶었다. 그토록 바랐건만 실제로 딱 현실이 되니까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우선 걱정이 컸고, 설렘은 사실 그 뒤에 찾아왔다. 준비 기간 내내 긴장 상태였는데, 촬영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긴장하고 걱정하면서 촬영을 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크리스털 크롭트 재킷, 로우라이즈 스커트, 언더웨어 모두 미우미우.
화이트 원피스 딘트.
이설이 되기까지 처음엔 대본을 들고 여러 선생님들을 찾아갔다. 캐릭터가 지닌 사연이 너무 깊다 보니 그만큼 깊이 있는 분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감독님, 조감독님과도 얘기를 많이 나눴고 감사하게도 중간에 한번 작가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질문을 10개도 넘게 적어 가서 하나하나 다 여쭤봤다. 촬영 초반에는 현장이 낯설어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중간쯤인가 재희(수애 분)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어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후배 이이담으로서가 아니라 이설로서 선배님을 좋아하는 감정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마 그 시점부터 이설의 대사를 좀 더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전까지는 그저 ‘잘해야겠다’ 정도였다면 그때부터는 ‘정말 재희를 구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후에도 재희에 대한 감정선, 심적 변화에 중점을 뒀다. 배움의 현장 수애 선배님은 리딩 때 처음 만났다. 그땐 긴장감도 컸고 뭔가 좀 압도되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너무나 잘 챙겨주시고 항상 웃으며 근황도 물어봐주셔서 점점 긴장을 풀게 됐다. 연기를 하면서도 길을 잃거나 방향을 잡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끔 이정표를 툭툭 던져주셨다. 도움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실제로 촬영장에서 선배님들이 연기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 에너지가 엄청나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서 그 에너지를 느끼니까, 자극도 많이 얻고 공부도 많이 됐다.
화이트 재킷 제인송, 화이트 원피스 딘트, 슈즈 드래.
이설을 떠나보내는 마음 <공작도시>가 1년이 넘도록 내 주변에 있었다. 지난해 11월까지 8개월 동안 촬영했고, 방영을 시작한 뒤에도 뭔가 여러 가지로 체감이 잘 되지 않았다. 그게 오늘 끝난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든다. 어떤 종류의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더 이상 이설을 연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섭섭함인지, 그토록 오래 붙들고 있던 <공작도시>가 끝난다는 섭섭함인지. 어쨌든 촬영을 마친 뒤부터는 체력을 키우고 건강한 몸을 만들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동안 못 본 다른 드라마나 영화도 몰아서 보고, 책도 자주 읽으려고 애쓰는 중이다. 예전에는 하루라도 쉬는 틈이 있으면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는 편이었는데 요즘에는 확실히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코로나19 때문이기도 하지만 넷플릭스 같은 OTT 플랫폼이 많아지기도 했고. 그렇게 다른 것들에 집중하면서 조금씩, 자연스럽게 이설을 떠나보내고 있다. 캐릭터로 기억되는 것 평상시에는 액션 영화, 오락 영화, 볼거리가 다양한 영화를 좋아하지만 자극이 필요하거나 참고하고 싶을 때는 배우를 중심으로 영화를 고른다. 가장 좋아하는 외국 배우는 케이트 블란쳇이다. 개인적으로 <캐롤>에서 반했는데, 스펙트럼이 정말 넓은 배우라고 느낀다. 어떤 장르를 연기하든 케이트 블란쳇이 아니라 그 인물로 보이는 것도 대단하다. 배우로서 정말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닐까? 내가 안 보이는 것, 캐릭터로 보이는 것. 내가 그 역할을 잘 표현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많은 분들이 내 연기를 좋아해주셨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다만 그만큼 중요한 게 그 사람 자체의 매력이라고 본다. 연기 실력도 중요하지만 뭔가 다른 매력이 있거나 아니면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거나. 관객들은 물론 작가님, 감독님들이 계속 같이 작업하고 싶어 하는 그런 ‘매력 있는 사람’이 된다면 좋겠다. 좋은 배우, 좋은 사람 내가 이설을 완벽하게 연기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설의 감정에 대해 좀 더 보는 분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다음 작품에서는 더 나은 배우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올해는 그걸 위해 노력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지금껏 작품을 많이 해오진 않았지만 상처 입거나 트라우마를 지닌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보는 분들이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밝고 기분 좋은 장르의 작품을 꼭 해보고 싶다. 무엇보다 나는 아주 오래도록 연기하고 싶다. 작품을 자주 하지는 못하더라도 후에 나이 든 모습으로도 연기할 수 있으면 좋겠고. 또 옳고 그름을 아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는데, 앞으로도 쭉 지금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좋겠다. 연기에 대해 부족하다고 느끼는 지점들을 늘 고민하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고 연차가 쌓여도 계속 고민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사진

오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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