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디슈머 전성시대
그저 주어진 대로 먹거나 쓰지 않는 요즘 소비자들의 재기발랄한 창의력에 대하여.
BY 에디터 장혜정 | 2022.05.13
‘냄비에 물 550ml를 부은 뒤, 물이 끓으면 라면 사리와 수프를 넣어 4분 30초간 더 끓인다.’ 친구 A는 오늘도 라면 봉지에 적힌 조리법을 충실히 따르며 매뉴얼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무척 간단해 보이지만 이 조리법이야말로 연구원들의 피, 땀, 눈물로 일궈낸 황금 레시피라는 소리다. A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세상 맛있는 짜파구리의 탄생 배경을 떠올리면 어쩐지 FM만 고집하는 A가 심심하게 느껴진다. 널리 알려진 대로 짜파구리는 짜파게티와 너구리의 조합이다. 농심에서 아예 정식 제품을 출시해 이제는 뚝딱 물만 부어도 맛볼 수 있지만, 2009년 한 대학생이 자신의 블로그에 해당 레시피를 올렸을 때만 해도 ‘아니 어떻게 저렇게 기발한 생각을 다 했지?’ 싶을 만큼 혁신적이었다.
이 짜파구리가 유행을 탄 것은 MBC 예능 프로그램 <아빠! 어디 가?> 덕분이었다. 당시 방송인 김성주가 짜파구리를 선보이며 쏘아 올린 ‘섞어 먹기 열풍’은 오징어짬뽕과 짜파게티를 믹스한 ‘오파게티’, 왕뚜껑과 너구리의 이색 만남 ‘왕구리’ 등 다양한 혼종의 등장을 부추겼다. 그렇게 촉발된 ‘내 입맛대로 만들어 먹기’는 현재 모디슈머란 용어로 정착돼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모디슈머란 ‘Modify(수정하다)’와 ‘Consumer(소비자)’를 조합한 단어로 제조업체가 제시한 사용법이나 조리법은 거들 뿐,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먹거나 사용하는 소비자를 뜻한다. 단순히 새로운 레시피나 사용법을 개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SNS에 공유함으로써 유행을 선도하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모디슈머의 의견을 적극 반영 중이다. 이에 건국대학교 소비자학과 김시월 교수는 학보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소비자의 수준 향상으로 전문성이 높아지고 역량이 강화되면서 소비자들이 생산을 위한 의사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며 모디슈머의 의의를 설명한 바 있다.
오늘날 모디슈머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단연 식품 산업이다. 짜파구리에 이어 카레와 너구리를 섞은 ‘카구리’를 출시한 농심은 최근 신라면 볶음면과 짜파게티를 조합한 ‘신볶게티’를 내놓았다. 이 역시 소비자들이 먼저 개발한 레시피를 상품 출시에 응용한 사례다. 골프족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유행하던 ‘맥사(맥주+사이다)’ 레시피를 캐치해 ‘맥싸’를 출시한 GS25, 케첩과 마요네즈를 섞어 먹는 소비자를 겨냥해 ‘케요네즈’를 선보인 오뚜기 등 모디슈머를 의식하며 상품을 개발하는 기업이 적지 않지만, 모디슈머를 반드시 레시피 조합의 패턴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들이 제조업체에 원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요청한 덕분에 새로 만들어지거나 부활한 상품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요즘 품절 대란을 일으킨 포켓몬 빵이 좋은 사례다. 어릴 적 포켓몬 빵을 먹으며 띠부띠부씰을 모았던 30대들이 다시 빵을 생산해달라는 간청을 꽤 했다는 것. 여기에 포켓몬 게임을 즐기며 친숙해진 어린이들의 반응이 더해져 포켓몬 빵은 16년 만에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됐다. 이 밖에 초록색과 빨간색의 비율이 뒤바뀐 ‘거꾸로 수박바’, 초콜릿 대신 커스터드 크림을 넣은 ‘홈런볼 커스터드 크림’, 기존 대비 중량을 20% 더 늘린 ‘팔도 비빔면 컵 1.2’ 등이 탄생한 데도 소비자의 요구가 주효했다.
이렇듯 요즘 시장을 좌우하는 모디슈머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먼저 그들이 왜 기존 상품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파이를 만들어내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자신의 개성을 중시하는 요즘 소비자의 성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먹고, 즐기고, 소비하는 것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시대에 제조업체가 일방적으로 내놓은 기성품은 그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것과 저것을 섞어 익숙한 듯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이유 역시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한 끗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코로나19로 인한 집밥, 혼밥의 증가가 이런 현상을 부추겼다는 반응도 흘러나온다. 자주 먹는 라면, 음료에 물려 다르게 먹는 방법을 고민할 기회가 많아지다 보니 자연히 이것저것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게 됐다는 것.
한편 경험을 중시하고 이를 공유하는 게 익숙한 MZ세대의 성향이 모디슈머를 키웠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이렇게 해봤더니 맛있더라’ 하는 경험을 SNS에 올려 공유하는데, 이런 콘텐츠가 퍼져 유튜브 먹방, 쿡방에 반영되기 시작하면 그 파급력은 기업의 제품 개발에 입김을 불어넣을 만큼 강력해진다. 실제로 모디슈머의 영향력이 막강해지면서 전에 없이 새로운 제품, 원하는 제품을 만날 기회가 늘어난 건 사실이다. 소비자의 권리를 드높이며 어깨를 으쓱하게 만든다는 점도 십분 공감하지만 다른 한편 재미, 경험, 개성 등 다양한 이유로 모디슈머를 자처하며 자발적으로 기업의 홍보 요원이 되는 면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 입장에서야 사실 유리한 점이 많다. 자발적인 바이럴마케팅이 일어나니 판매에 큰 도움이 되고 이미 화제가 된 레시피나 상품을 출시하는 만큼 리스크도 확연히 줄어든다. 그러나 SNS 핫템, 꼭 먹어봐야 할 신메뉴 등 온갖 혹하는 문구에 끌려 매번 이것저것 사들였다 적잖이 실망했던 경험이 꼭 한 두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닐 터. 재미있고 신선한 경험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잠깐 반짝하고 사라지는 유행은 어쩐지 씁쓸하기만 하다.
일러스트
김가빈
짜파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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