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을 잃지 않고 형형하게 빛나는 곽선영
만물의 법칙이 뒤죽박죽 엉켜버린 기이한 세계. 그러나 깊숙이 닻을 내린 곽선영의 고아함과 섬밀함은 그 안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형형하게 빛난다.
BY 에디터 양혜연 | 2023.03.16
재킷, 베스트, 스커트, 슈즈 모두 플랜 C.
배우 곽선영을 만난 건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허리를 살짝 굽히고 종종걸음으로 스튜디오로 들어오던 그녀는 시선이 닿는 모든 이에게 연신 인사를 건넸다. 동물 피규어를 발견했을 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와 가젤도 있어”라며 좋아했고, 양쪽 종아리를 바깥으로 두고 앉는 포즈 요청에 지난날의 무릎 부상으로 인해 이렇게 앉지 못한다며 미안해했다.
정확한 표현을 위한 고민의 시간이 직조한 적막의 틈새로는 <두뇌공조> 속 소심했던 설소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신중하게 선택한 단어들을 꼭꼭 뭉쳐 만든 간결한 답변과 아닌 건 아니라 말하는 결연한 태도에서는 두뇌 개조 후 설소정의 표정이 설핏 어렸다.
인터뷰 끝 무렵 그녀는 책 한 권을 꺼내며 요즘 주변에 자신이 소장한 책을 나눠주고 있다 말했다. 이미 본 책은 아닌지, 자신이 한 번 읽은 것도 괜찮은지 확인하고 나서야 미소를 머금고 받아달라 ‘부탁’했다. 좋은 걸 나누고 싶다는 마음은 고아했고, 누군가의 손을 탄 것이 혹여 불쾌하진 않을까 염려하는 조심성은 섬밀했다. 두 손을 내밀어 받은 책의 표지에는 <우리, 편하게 말해요>란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너 터틀넥 그레이양, 오렌지 슬립 에센셜, 슈즈 세르지오 로시, 링 골든듀
곽선영은 참 차분한 느낌이다. 청개구리 심보일까? 그걸 깨고 싶었다. 화보 시안을 받고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하다.
정말 좋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뭔가 독특하고 재미있는 화보를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전부터 막연하게 늘 해왔기에 무척 반가웠다.
화보 콘셉트는 <두뇌공조> 속 설소정의 성격이 어느 날 180도로 바뀐다는 점에 착안했다. 개인의 성격 대신 자연의 법칙이 뒤바뀌면 어떨까란 상상. 실제로 이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행동할 건가?
일단 모든 움직임을 최소화한 채로 주변을 관찰하며 상황을 파악할 거다. 그리고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해 조금씩 적응해나가야지.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를 해보지는 않고?
새로운 세계도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마음대로 바꿀 순 없지 않을까? 왜 이런 상황이 내게 닥쳤는지 알고는 싶겠지만 그건 나중 문제고 일단 순응해야지.(웃음)
잘 적응할 것 같다. 배우란 직업의 특성과 통하는 지점이 있는 상상이라 생각하는데, 곽선영은 특정 배역에 매몰되지 않고 항상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니까. 늘 미지의 캐릭터와 세계를 탐험하는 건 어떤 기분인가?
일단 비슷한 역할이 아닌 다양한 인물을 연기할 기회가 있다는 건 굉장히 감사한 일이다. 물론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작업 과정이 힘들거나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 즐겁게 임한다. 특히 현장에서 의상, 소품, 세트 등이 잘 맞물리며 나오는, 역할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내가 분석한 것 이상으로 보여줄 수 있을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
설소정이란 캐릭터를 입체화할 땐 뭘 고민했나?
고민이라는 단어와는 조금 맞지 않을 수 있는데, 이전에 소심했던 모습을 소정이가 기억하고 있단 사실을 잊지 않으려 했다. 그걸 인식하고 있다는 걸 부러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잊지 않았을 때만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들도 있으니 계속 마음 한편에 두고 있었다.

퍼플 투피스, 링 모두 모스키노
한때 온라인에서 소소하게 유행한 ‘뇌 구조도’ 밈을 알까? 곽선영이 그린 설소정의 두뇌 개조 전후의 구조도가 궁금한데.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며) 안 그래도 그려왔다. 소심한 소정이의 뇌 중심에는 ‘계장님’이 있을 거다. 그 주변으로 ‘정확히 하자’ ‘혼 안 나기’ ‘용기’ ‘금형사님’ ‘꼬르륵’과 같은 단어가 자리할 듯하다. ‘꼬르륵’은 눈치보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으니까.(웃음) 성격이 바뀐 후엔 중심에 ‘금형사님’이 있겠지. 그 외엔 ‘범인 검거’ ‘현장투입’ ‘뇌선생’ ‘증거’ ‘러브 시스템’ 그리고 금형사님 전 부인 ‘모란’이 있을 거 같다. 계장님이 빠진 건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다른 것들로 머릿속이 꽉 차 있거든.
미리 그려올 줄은 몰랐는데, 사진 좀 찍겠다.
앗! 사진 찍을 줄 알았다면 글씨를 좀 더 예쁘게 쓸걸.
참고용으로 나만 볼 거니 걱정 말라. 이제 곽선영의 뇌 구조도를 구경해보자.
가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을 시작하면 가족 60%, 일 40% 정도로 나뉘고.
2006년 뮤지컬 <달고나>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다. 드라마는 2018년 <친애하는 판사님께>가 처음이었고. 무대와 촬영을 모두 경험한 입장에서 장단점을 비교해달라.
무대는 두 달 동안 연습하며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 있어 더 응축된 연기를 선보일 수 있다. 대신 촬영은 카메라앵글이나 음악, 편집 등을 통해 내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단점을 비교하자면 무대는 오늘 공연에서의 연기가 좋았어도 다음에 고스란히 재연할 수 없다는 것. 촬영은 똑같은 연기를 앵글을 바꿔가며 몇 번씩 반복하는 게 초반에 조금 힘들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했다.
드라마를 시작한 후로는 무대에 한 번밖에 오르지 못했다. 갈증이 있을 것 같다.
무대는 항상 오르고 싶다. 사실 제안이 좀 있었는데 스케줄이 겹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기회가 되면 꼭 하고 싶다.
오랜만에 무대에 오른다면, 이왕이면 어떤 작품이면 좋겠나?
연기로 무대를 가득 채우고 싶다. 이전에 맡은 <렁스>와 같은 2인극이면 좋겠다.
작품 선택 기준이 궁금하다.
일단 대본이 재미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잘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오래 한다. 물론 그동안 선택한 역할이 모두 자신 있어서 맡은 건 아니지만 꼭 해보고 싶다든가, 잘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다든가 등의 이유가 확실할 때 골랐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후회되는 선택은 없다. 고민을 워낙 길게 하는 편이라.(웃음)

레몬 레더 드레스 프라다, 슈즈 지미추
데뷔 이후 무대와 드라마를 합쳐 공백기가 없다는 점이 대단하다. 길게 휴식을 취하고 싶을 법도 한데.
작품이 끝날 무렵이면 새로운 작품을 받아 또다시 연습을 시작하는 생활을 오래 반복해 익숙하다. 쉬고 싶었던 적이 없기도 했고. 그냥 일이 너무 재미있다.
연기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나?
잘 모르겠다. 마냥 좋다.
하긴, 원래 진짜 좋아하는 건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진짜인 거니까.
그런가?
그래도 꾸준함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지런한 사람이니까 가능한 거다. 최근 ‘하루 종일 TV 보기’가 힘들 것 같다 말한 다른 매거진의 영상 인터뷰를 봤다. 정말이지 거리감이 느껴졌다.(웃음)
하하, 일단 나는 TV를 잘 보지 않고 그냥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가족들도 내가 관찰 예능에 출연하면 사람들이 ‘왜 저렇게 쉬지를 못하지?’라고 생각할 거라더라. 얼마나 가만히 있지 못하나 싶어 따져보니 5분을 못 넘겼다.
쉬지 않고 뭘 그렇게 하나?
청소, 빨래, 설거지 등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는 살림이 재미있다.
촬영 오기 전에도 집 구석구석을 청소했겠다.
오늘은 주말이니까 아이와 축구를 했다.
축구라니 대단하다. 그 외에도 아이와 뭘 하며 시간을 보내나?
요즘엔 남편까지 셋이 함께 보드게임을 한다. ‘부루마블’ ‘루미큐브’ 등. 최근에 ‘도블’이라는 그림 찾기 보드게임도 자주 하는데 무척 재미있다. 추천한다.
셋이 하면 보통 누가 이기나?
당연히 아이가 이겨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펼쳐진다.
육아를 경험하지 못한 자의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참,자녀가 엄마가 TV에 나오는 사람인 줄은 알지만 작품을 본 적은 없다고.
최근에 봤다. 아이가 숙제를 할 때 옆에서 나는 대본을 보니까 내가 출연하는 드라마 제목과 배역 이름 정도는 원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에게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를 보여달라고 하더라. 살짝만 보라고 틀어줬는데 “넷플릭스에 엄마가 있어! 엄마다!”라며 신기해했다. 근데 곧장 이렇게 말하더라. “이제 그만 <스폰지밥> 볼래요.”(웃음)

블랙&화이트 가죽 드레스, 슈즈 모두 로에베.
배우로서, 엄마로서, 곽선영이란 한 사람으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
어려운 질문이다. 우선 배우로서는 진짜 그 인물인 것처럼 보이게끔 연기하고 싶다. 음… 그리고 엄마로서는. (한참 고민 후) 당연히 친구 같은 엄마로 쭉 곁에 있고 싶다. 그리고 곽선영이라는 한 사람으로 서는 음….(약간의 정적) 나 진짜 고민 많이 하지? 단어를 하나 선택하는 데도 이렇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면 사실 지금의 모습도 뭔가를 계획하고 목표해서 이룬 것이 아니다. 자연스레 물 흐르듯 온 거라. 그래도 한 가지 바람을 말한다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얼굴에 편안함이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
고민은 어린 시절부터 많았나?
어렸을 땐 더 심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려 항상 고민했다. 후회는 괴로우니까. 다만 나이가 들며 서서히 나아진 건 마음의 소리를 좀 듣게 되었다고 할까? 다들 알겠지만 사실 하고 싶은 건 이미 내 마음속에 정해져 있다. 물론 지금도 고민을 하긴 하는데,(웃음) 조금은 편하게 마음의 소리를 따른다. ‘실패하고 후회하면 뭐 어때, 다음에 잘하면 되지!’란 마인드로. 그래도 말을 할 때 단어를 선택하는 건 여전히 오래 걸린다.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가? ‘내 생각을 좀 더 정확하고 온전하게 표현하고 싶어서’란 표현이 정확하겠다. 단어 하나로도 의미가 크게 달라질 수 있으니까.
곽선영에게 받은 새것처럼 띠지가 반듯하게 둘러진 책의 표지를 열고 페이지를 스르륵 넘겨보았다.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밑줄을 치거나 접은 흔적은 물론 작은 얼룩조차 없었다. 반나절 동안 얼핏 들여다본 곽선영의 성정처럼 안온한 미색의 빳빳한 종이가 한 장씩 넘어갈때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단어들이 묵직한 문장이 되어 내려앉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다짐했다. 다시 곽선영을 만나게 된다면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고른 책 한 권을 꼭 선물해야지. 인사말로는 이런 ‘부탁’을 건넬 것이다. “우리, 편하게 말해요.”
포토그래퍼
주영균
스타일리스트
이지나
메이크업
강주리(살롱하츠)
헤어
인하(살롱하츠)
어시스턴트
양윤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