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디톡스를 시작할 때

‘플렉스’를 외치던 시대는 갔다. 지금의 청년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비 디톡스’ 라이프에 뛰어들었다.
BY 에디터 송혜민 | 2023.03.21
2023년 3월로 완벽한 1인 가구가 된 지 만 2년이 된다. 그건 곧 전세 만기가 다가오고 있으니 전세대출을 연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안 그래도 6개월에 한 번 금리가 바뀌는 변동금리 대출 상품을 이용 중이라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출 이자가 슬그머니 오르던 차. 게다가 계약 연장을 하며 관리비도 높아져 마음의 부담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 판단, 새 계약서에 사인하고 대출 연장 심사도 받기로 했다. 은행에 심사를 넣은 지 열흘째 되던 날, 은행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등골이 서늘했던 건 기막힌 우연이었을까. 은행 직원이 한없이 상냥한 말투로 꺼낸 소식은 이전보다 정확히 두 배 높아진 금리였다. “그럼… 한 달에 내야 하는 이자가 00만원이라는 말씀이시죠?” 약간 얼떨떨한 채로 되묻자 요즘 채무자들은 다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투의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올해 연봉이 얼마나 인상됐더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는 건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 대출 이자에 가스비, 외식비, 생활 물가까지. 살아 있는 한 꼭 써야 하는 고정 지출 비용은 늘어나는데, 오르지 않는 건 내 월급뿐이라는 ‘웃픈’ 밈은 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나. 대출 연장이라는 현대인의 통과의례(?)를 치르며 내 소비 생활을 다시 한번 돌아보다가 괜히 겸허해지는 마음이었다. 팬데믹 상황 속에 폭주했던 주식이며 코인 열차의 차갑게 식어버린 열기 또한 피부로 와닿는 요즘, 2023년 트렌드 서적 속에서도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소비 키워드를 찾아볼 수 있다. 소비 디톡스는 물론 ‘체리슈머(케이크 위의 체리만 골라 먹듯 필요한 것만 취하는 전략적 소비)’ ‘무지출 챌린지’ 등 이전에 없던 키워드들이 그것이다. 당장 소비를 줄여야 하는 생활이 비단 나만이 아니란 방증이다. 그래서 실제로 사람들은 올해 어떤 소비 계획을 세우는지 궁금해졌다. 과연 우리 청년 세대에게 소비 디톡스는 선택인가, 필수인가.
*2023년 2월 7~13일 싱글 플러스(www.thesingle.co.kr)에서 성인 33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구두쇠가 아니라 체리슈머입니다
소비 트렌드 키워드가 바뀌고 있다. 손가락만 한 두께의 금목걸이를 줄줄이 차고 나와 ‘플렉스’를 외치던 래퍼들이 사라진 지는 오래고 주식으로, 코인으로 벼락부자가 됐다는 썰도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엔 ‘매도하지 않으면 손해는 아니’라는 위로만이 남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이 자주 쓰는 단어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설문 응답자들에게 최근 들어본 ‘소비 트렌드 키워드’에 대해 물었더니 과소비를 대표하는 플렉스 시절의 키워드보다 최근의 ‘절약’ 키워드가 더 많았다. 먹을 것 덜 먹고, 살 것 덜 사고, 저축하는 라이프스타일을 SNS 등에 오히려 과시하는 ‘과시적 비소비’, 이를 도전으로 여기는 ‘무지출 챌린지’는 물론 체리슈머, 짠테크, 가실비(가격이 비싸더라도 자주 사용하고, 일상에서 충분한 효용 가치를 느끼는 제품을 구매하는 일) 등의 응답이 주를 이뤘다. 과거엔 구두쇠, 짠돌이 또는 궁상맞다는 소리를 들었을 소비 패턴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기업들은 오히려 이들을 ‘영리한 소비자’로 분류하고, 유연한 소비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사용 기한이 임박한 영화 예매권, 사용하지 않는 커피 기프티콘을 10~20% 저렴하게 거래할 수 있는 온라인 쿠폰 거래 플랫폼이나 최저가 검색 기능을 지원하는 앱이 등장하는 건 청년 세대의 이런 관심사를 반영하기 때문일 테다. 당근마켓은 공동구매 서비스 ‘같이사요’를 지난해부터 서울 일부 지역에서 시범 운영 중이다. 60구 달걀, 김치 1kg을 함께 사서 나눌 수 있게 한 것. 지난해 12월 한 달, 이 서비스 이용자는 관악구에서만 론칭 첫 달 대비 137%나 늘었다. 쿠팡이츠는 22년 8월부터 배달 공구 서비스 ‘친구 모아 함께 주문’을 시작했다. 이 서비스 이용은 20대, 회사원이 많은 도심에서 오전 10~12시 사이에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바뀐 소비 트렌드 키워드는 무조건적으로 지출을 줄이겠다는 말이 아니라 꼭 필요한 곳에 합리적인 만큼만 소비하겠다는 시대의 선언과도 같다.
고물가, 고금리 What’s next 高?
한국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22년 1분기 국민고통지수(소비자물가상승률에 실업률을 더한 수치)는 10.5로 확장실업률(체감실업률 지표)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15년 1분기 이래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혹한 경제 상황은 자산 기반이 취약한 청년 세대에게 더 무겁게 다가온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해 11월, 청년 체감경제고통지수가 역대 최고치라고 발표한 바 있다. 다른 연령층도 같은 기간 최고 수준을 기록했지만 그중에서도 청년층이 가장 높았다. 게다가 주거, 식료품, 교통 등 청년층이 주로 소비하는 분야에서 집중적인 물가 상승이 일어나면서 소득이 적은 이들에겐 즉각적인 부담이 돼 돌아왔다. 급격한 금리 인상도 청년 세대의 일상을 위협한다. 지난해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공개한 한국신용정보원 자료를 보면 2018년 3월부터 2022년 6월까지 20대 가계대출 총액은 61.8% 늘었다.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출이 필수인데, 금리까지 높아지니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싱글즈> 설문 응답자들도 최근 물가 상승으로 개인적인 소비 패턴을 바꾸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소비를 하는 항목은 식비와 주거가 압도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우려스러운 건 최근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고 있다는 점이다. 환율이 급등하면 필연적으로 금리와 물가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서민 경제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물가 안정을 위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실질적인 대응책이 될 수 있을지는 시간을 들여 지켜봐야 할 듯하다.
소비하지 않는 삶이라도
놀라운 건 설문 응답자의 93%는 올해 소비를 줄이겠다고 밝혔다는 점이다. 그중 무려 절반이 올해는 쇼핑을 덜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주거, 통신, 의료 등은 고정 지출 항목이라 늘어나는 걸 의지대로 막기 어려우니 줄이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 ‘과시적 비소비’ ‘무지출 챌린지’ 같은 트렌드는 청년 세대의 현실을 담은 블랙코미디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사회적 협동조합 ‘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의 백승훈 사무국장은 인터뷰를 통해 무지출 챌린지라는 말 앞에는 ‘오죽하면’이라는 단어가 생략돼 있다고 했다. 청년 세대는 ‘고비용 저소득 세대’라며 “지금의 현상을 청년들이 처한 경제적 특수성 안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무지출 챌린지, 과시적 비소비 같은 것이 반짝하고 사라지는 유행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를 동반하는 사회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한편 ‘쇼핑에서 얻는 즐거움이 예전 같지 않아서’ ‘모방소비를 경계하기로 했다’는 답변이 포착된 건 흥미로웠다. 그에 반해 ‘지출을 늘리고 싶은 항목’에 대해 묻는 질문에는 43%의 응답자가 여행과 운동 등을 포함한 여가를 선택했다. 삶의 만족도, 팬데믹 이후의 여행 활성화 기대, 운동으로 건강 지키기 등을 이유로 꼽았다. 소비를 통해 단순하고 즉각적인 만족감이 아닌 더 큰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일상적 가치소비
실제로 가치소비 트렌드에 동의한다고 답한 응답자가 80%에 달했다. 또 10명 중 6명은 가치소비를 실천한다고 답했다. 예전 같으면 환경이나 사회문제에 관심 많은 소비자에게나 해당한다고 생각했을 법한 소비 행동이 청년 세대의 일상으로 스며들었다고 봐도 무리 없을 수치. 가치소비란 광고나 브랜드 마케팅에 휘둘리지 않고 가치 판단을 토대로 제품, 서비스를 구입하는 일을 말한다.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이슈로 논란을 일으킨 기업에 대해 불매운동을 하는 것, ESG 경영에 적극적인 기업의 재화라면 더 비싼 금액을 지불하더라도 구입하는 것 등을 포함해 개인적인 가치관을 드러내는 소비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설문 응답자들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불매, 보이콧, ESG 소비, 무지출, 중고거래 등을 실천한다고 했다. 지난해 계열사 제빵 공장의 인명사고로 시작된 SPC 불매운동은 파리바게뜨, 배스킨라빈스, 던킨도너츠 등으로 번졌다. 해피포인트 앱 이용자도 한 달 만에 약 21% 줄었는데 불매운동의 여파로 분석된다. SPC 허영인 회장은 공개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를 위해 총 1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소비자들은 실제로 기업 문화가 얼마나 바뀌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렇듯 똑똑한 소비자와 시대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한 움직임은 ESG 경영 선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14일 발표한 ‘2023 ESG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90%가 올해 ESG 경영을 작년 수준으로 유지하거나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세계적인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고, 사업구조 전환을 통한 ESG 경영 환경이 정착된 것”으로 분석했다. 소비자들이 가깝게는 친환경 리필스테이션 등의 일상 속 친환경 경영부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적 책임 경영, 기업 내부의 합리적이고 투명한 지배구조 개선 등 다양한 형태의 ESG에 주목하면 일상적인 소비 생활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일러스트

김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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