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나 성격보다 지성에 반하는 사피오섹슈얼
첫눈에 별로였지만 누군가와 대화하다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면? 당신도 사피오섹슈얼일지 모른다.
BY 에디터 김희성 | 2023.04.20
“아, 집에 가고 싶다.” 오랜만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간 소개팅에서 5분 만에 든 생각이다. 아, 오해는 하지 마라.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상대방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문제는 아마 내게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운 좋게도 한눈에 반할 만한 상대를 소개팅 자리에서 만났다 해도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집에 가고 싶은 기분이 드니까. 탄탄한 몸이나 조각같은 외모, 친절함이나 배려심 같은 요소만으로는 이렇다 할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특히 참을 수 없는 건 주고받는 대화가 정말 재미없을 때다. 여기서 ‘재미’는 유머러스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소개팅 자리에서 흔히 오고 가는 그런 말들, 이를테면 “MBTI가 뭐예요?” “혼자 있을 땐 주로 뭘 하나요?” “가장 마음에 드는 여행지는요?” “혹시 연예인 누구 닮았다는 말 들어본 적 없나요?” 같은 실없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 말이다.
처음 본 사람과 뭐 그리 특별한 할 말이 있겠냐만 심장이 뛰지 않는 걸 어떡해. 예전에 정말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을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비즈니스 미팅을 한다는 생각으로 그 시간을 최대한 즐겁고 정중하게 보내고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와의 만남은 이후에도 수십 번이나 더 이어졌다. 그는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남자였다. 오늘 읽었던 칼럼, 감명 깊었던 인터뷰 기사를 수시로 메신저에 공유하고 마음에 드는 책을 각자 한 권씩 사서 함께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사람.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부터 본격적인 데이트가 시작되는 사이. 영화를 함께보는 것보다 그 작품에 관한 각자의 해석을 공유하는 것이 더 재미있는 사이. 혹시 그런 사람에게 끌린다면 당신은 사피오섹슈얼(Sapiosexual)일지도 모른다.
사피오섹슈얼은 상대방의 지성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해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사피오(Sapio)’에서 유래했다. 사피오섹슈얼은 온라인 데이팅앱 ‘오케이큐피드(OKCupid)’가 사용자의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표시하는 카테고리에 이 용어를 포함시키며 널리 알려졌으며,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 앱의 사용자 중 0.5%가 자신을 사피오섹슈얼이라 정의했다고 한다. 연령은 대체로 31~40세, 성별은 여성이 더 많다고.
사피오섹슈얼은 결국 상대방의 외모보다 지적 능력에 성적으로 끌리는 이들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성에게 반하는 첫 번째 요소가 바로 지성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피오섹슈얼이 상대방의 지성 이외에 다른 부분을 전혀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외모나 공감 같은 측면을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요소보다 지적인 면이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사피오섹슈얼에 관한 연구 결과는 세계적인 학술 출판사인 네덜란드 엘제비어가 출간하는 학술지 <인텔리전스(Intelligence)>에도 발표된 바 있다.
서호주대 학교의 연구진은 18~35세 남녀 383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참가자는 지능과 성적 매력 사이에 큰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았지만, 8%의 실험 참가자들은 상대방의 지적 능력에서 성적 매력을 느낀다고 답했다. 연구진은 이 연구를 통해 어떤 사람들에게는 높은 IQ 등의 지적 매력이 성적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밝혔다.
나는 사피오섹슈얼이다
23% / yes
“선베드에서 책 읽는 남자 어디 없나요?”
누군가는 상대방의 복근이나 미소, 다정함에 사랑을 느낄지 모르지만 사피오섹슈얼은 상대방의 지적인 모습에 가장 큰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사피오섹슈얼 성향의 이성을 사로잡기 위해 상대방이 이해하기 어려운 현학적인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아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모르는 층위의 무언가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전제는 상대방의 관심이나 호기심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세계에 관한 지식을 교양 프로그램을 통해 습득하며 재미와 희열을 느끼는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재미있으려면 알지 못하는 이야기일지라도 너무 딱딱하고 어렵기만 해선 안 되고 어느 정도의 흥미를 유발하고 적당한 재미도 있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상대방의 높은 학벌이나 지식을 맹목적으로 좋아하거나 상대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고 늘어놓는 학문적인 이야기들에 반한 것이라면 당신은 건강한 의미의 사피오섹슈얼은 아니다. 내 안의 결핍이나 지적 허영심을 상대방을 통해 채우려는 심리가 작용해 그것을 사랑이라 느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모든 관계가 그렇지만 특히 연인 간에도 자격지심이나 우위의 감정 없이 서로가 동등한 관계일 때 건강한 사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상대방이 지적이라는 기준도 결국은 상대적인 것. 사피오섹슈얼이 진정 사랑하는 상대는 실제로 똑똑한 사람이기보다 기가 막히게 대화가 잘 통하는 센스있고 배려 넘치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연인과 함께 있는 시간이 소모적이지 않고 발전적이기를 원하는 유형일지도. 그나저나 팔로 해놓은 SNS 중에 ‘핫 듀드 리딩(@hotdudesreading)’이라는 계정이 있다. 지하철, 헬스장, 해변가, 기차 등 일상의 장소 곳곳에서 책을 읽는 남자들의 모습이 올라온다.
망상인 걸 알지만 언젠가 여행 중에 책 읽던 핫 듀드 중 한 명이 말을 거는 상상을 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건 ‘책’을 읽는 그들의 모습일까, 책을 읽는 그들의 ‘멋진’ 모습일까. 내가 진정한 의미의 사피오섹슈얼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일러스트
노여진
연애
소개팅
사피오섹슈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