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에 선 베테랑 디자이너
새로운 브랜드에서 새 출발을 시작한, 혹은 새롭게 이끌어갈 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이야기.
BY 에디터 손소라 | 2023.04.26
패션계만큼 새로운 사람이 주목받는 분야는 드물다. 대체로 옷과 액세서리와 같은 최종 결과물이 주목을 받는 게 인지상정인데, 패션은 어떤 ‘사람’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또 변화를 주도하는지가 브랜드의 판도를 좌우한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교체와 그 데뷔전은 마치 아이돌의 신보 소식 정도로 느껴진다.
2023년에도 수많은 인사이동이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이클처럼 반복되는 사임과 영입,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꽤나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는 루이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 정도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교체를 염두에 둔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이름 빼고 모든 걸 싹 다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거나, 될 만한 브랜드를 픽업해 하우스의 아카이브와 믹스하며 새로운 출발을 노리는 방식이다. 전자의 경우가 제대로 터지면 매출 신화는 물론이고 트렌드와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명예까지 얻게 된다. 그러나 제대로 터지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실력은 기본이고, 여기에 시의적절하게 날개를 달아줄 운도 필요하다. 피비 파일로의 셀린느,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구찌 그리고 뎀나 바잘리아의 발렌시아가가 좋은 예다.

1 마르코 드 빈센초. 2 필리포 그라치올리.
변신한 브랜드의 성적표는?
2023 S/S 시즌에는 에트로, 버버리, 페라가모, 미소니, 발리가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함께 새 시작을 알린다.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 주인공은 에트로의 마르코 드 빈센초. 에트로의 여성, 남성 그리고 홈 컬렉션을 책임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그는 펜디의 레더 액세서리 수석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쌓았고, 2009년 자신의 이름을 딴 여성복을 론칭했다.
그리고 작년 9월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에트로 2023 S/S 컬렉션을 처음 공개하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첫 성적표를 받았다. 마르코 드 빈센초는 임명된 후 겨우 4개월 동안 에트로 메종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해 기존의 전통적인 패턴을 현대적으로 풀이하는 과정에 집중했다. 여기에 자신의 아티스트적 감각과 자연을 사랑하는 취향을 근사하게 버무려냈다.
그 덕분일까? 런웨이는 한층 모던하고 젊은 감각으로 가득했고, 레이스 위에 프린트한 조젯 인레이 기법과 같은 희귀하고 정교하면서도 시각적인 느낌의 옷이 즐비했다. 갑작스러운 고별 인사로 보테가 베네타를 떠나며 패션계를 충격에 빠뜨린 다니엘 리. 뉴 보테가 시대를 열며 침체된 브랜드에 전성기를 선물한 그는 리카르도 티시의 뒤를 이어 버버리 하우스의 수장이 됐다.
동시대 가장 핫한 디자이너이기에 많은 관심을 받은 다니엘 리의 컬렉션은 쌓여 있던 베일만큼이나 묵직한 변화의 메시지를 선사했다. 그는 컬렉션 시작 전부터 캠페인을 통해 리카르도 티시가 변경한 산세리프체 폰트에서 좀 더 부드러운 서체로 로고를 변경했고, 버버리의 상징이었던 승마 기사를 되살렸다. 이 로고는 1901년 탄생해 2000년대까지 활발하게 사용되다 최근에는 TB 로고에 밀려 찾아보기 어려웠다.
승마 로고의 부활은 버버리 헤리티지 부활의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뿐만 아니라 로고 깃발에 적힌 ‘프로섬’으로 인해 잠시 사라졌던 버버리 프로섬 라인의 부활 역시 예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쇼가 끝난 후, 어떤 이들은 너무 기대가 컸던 것 같다는 아쉬운 반응을 보였지만 어찌 첫술에 배부르랴. 이제 첫 컬렉션이고 다니엘 리가 버버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도기 혹은 시작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니엘 리의 빈자리를 짊어질 마티유 블라지의 보테가 베네타 첫 성적표는 어땠을까? 1984년 프랑스 파리 출생의 마티유는 라프 시몬스의 남성 디자이너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다니엘 리와 마찬가지로 메종 마르지엘라를 거쳐 피비 파일로 시절의 셀린느에서 시니어 디자이너로 활약했다. 2020년부터 보테가 베네타의 디자인 디렉터로 임명돼 하우스의 일원으로 새로운 커리어를 쌓았다.
올 2월에 밀라노 패션위크를 통해 디렉터로서 그의 디자인 철학이자 신념인 ‘크래프트 인 모션’을 담은 이탈리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찬사가 어우러진 컬렉션을 처음 공개했다. 특히 양말처럼 보이는 레더 스트랩으로 뜬 부츠를 매치한 내추럴 홈웨어 룩부터, 물고기 비늘을 연상시키는 디테일과 인트레치아노 위빙 기법을 통해 보테가 베네타의 또 다른 시작을 표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런던의 떠오르는 샛별로 급부상 중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맥시밀리언 데이비스도 2023 S/S 페라가모의 새로운 변신을 공개했다. 26살의 그가 가장 처음 한 일은 브랜드 이름을 살바토레 페라가모에서 페라가모로 간결하게 바꾸고, 로고 디자인도 필기체에서 각진 형태로 한층 미니멀하게 변신한 것. 그는 브랜드에 전성기를 가져온 1950년대 할리우드 패션에 집중했고, 동시에 페라가모에 1990년대 감성을 주입하며 동시대적인 분위기를 불어넣는 데 집중했다.

1 맥시밀리언 데이비스. 2 마티유 블라지.
기술은 완벽하고 정보는 넘치며 천재는 차고 넘치는 지금, 캐릭터를 어떻게 잡는지가 앞으로 얼마나 자리 보전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하는 관전 포인트다. 리카르도 티시와 함께 지방시, 버버리를 거치며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온 필리포 그라치올리는 3대째 이어지는 패밀리 비즈니스 브랜드 미소니에 합류했다. 미소니는 니트, 다채로운 컬러, 밝은 에너지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진 브랜드지만, 보헤미안 시크가 다소 마이너하고 올드해 보이는 탓에 한동안 패션 피플에게 외면받아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시즌부터 1990년대 미니멀리즘으로 다시 돌아가 몸에 밀착되는 실루엣과 허리와 등까지 깊게 이어지는 슬릿 디테일로 여성스럽고 섹시한 관능미를 내세웠다. 여기에 하우스 특유의 스트라이프, 지그재그, 패치워크 패턴 DNA를 더해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발리의 새로운 수장인 루이지 빌라세뇨르다. 필리핀 마닐라 출생의 루이지는 테일러 출신인 어머니와 건축가 아버지로부터 미적 호기심을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디자인과 장인정신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2015년 설립한 럭셔리 스트리트 브랜드 루드를 통해 반스, 푸마, 캐나다구스 등 유수의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며 전 세계의 뜨거운 관심을 즐기기도 했다.
이런 그가 171년 전통의 스위스 가죽 하우스에 합류했다. 이 자체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한데, 첫 컬렉션을 통 해 ‘탈바꿈’이라는 콘셉트로 실크 벨벳 프린트 슈트, 파자마, 데님 등 예상치 못한 런웨이를 펼쳤고, 전반적으로 ‘관능’이라는 키워드를 담아냈다. 마치 톰포드 시절의 구찌 같은 느낌도 들었는데, 우아하고 고전적인 무드의 발리를 사랑하는 이라면 다소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1 루이지 빌라세뇨르. 2 다니엘 리.
개막식은 아직 진행 중
올해 가장 기대되는 두 사람이 남았다. 버질 아블로 사후 꽤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루이비통 맨을 이끌 퍼렐 윌리엄스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빈자리를 두고 후임으로 카니예 웨스트가 오퍼를 받았다거나 게스트 디자이너로 콜름 딜레인이 선정되며 그가 임명될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5년 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버질 아블로를 임명했던 루이비통이 이번에도 큰 놀라움을 안겨 줬다.
퍼렐 윌리엄스는 이미 과거에도 루이비통과 협업을 한 이력이 있고, 티파니, 샤넬과도 꾸준히 협업을 진행해왔다. 유명한 뮤지션, 프로듀서인 동시에 패션 예술 분야에서도 활동을 해왔기에 큰 걱정은 안 된다. 겐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인 니고와 함께 2003년 빌리네어보이즈클럽이라는 스트리트 브랜드를 론칭한 이력도 존재한다.
아직 모를 일이긴 하지만 퍼렐이 갑자기 섬세한 남성복을 선보일 것 같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엔데믹 이후 하이프 시장의 규모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고, 워크웨어와 테일러드의 접점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아니면 디자인의 방향성을 어디로 바꿀 것인가가 관전 포인트다. 루이비통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일지, 스트리트 패션의 독특한 미감이 앞으로도 꾸준히 맨즈 웨어를 주도해나갈 수 있을지, 또 그걸 퍼렐 윌리엄스가 잘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1 사바토 데 사르노. 2 퍼렐 윌리엄스.
2023 F/W 밀라노 패션위크에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없이 선보이는 최초의 구찌 여성복 컬렉션이 펼쳐졌다. 힙한 뉴트로의 선구자로 2015년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 변화를 이끌던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구찌를 갑작스레 떠났고, 그 자리는 대신 다소 생소한 이름의 사바토 데 사르노가 새로운 후임자로 정해졌다.
2024 S/S 시즌 컬렉션부터 유서 깊은 패션 하우스를 이끌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프라다의 여성복 패턴 메이커 어시스턴를 비롯해 돌체앤가바나, 발렌티노 등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패션 하우스에서만 경력을 쌓았다. 앞으로 어떤 디자인으로 어떻게 구찌를 바꿔 나갈지 아직은 감이 오지 않는다. 다만 그가 오랫동안 피엘파올로 피촐리와 함께했다는 부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과거의 구찌가 한 편의 빈티지 무드 판타지 동화 같다면, 새로운 구찌는 좀 더 화려한 디테일과 쿠튀르적인 면모에 집중하지 않을까. 핫이슈로 등극한 퍼렐 윌리엄스는 오는 6월 파리에서, 그리고 사바토 데 사르노는 9월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새 출발을 알린다.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색다른 멋을 맞이하는 패션 게임은 당분간 계속될 예정. 다음 시즌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사진제공
버버리, 보테가 베네타, 루이비통, 에트로, 페라가모, www.Imaxt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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