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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로크. 유리 오브제 불필요상점.

물드는 노을, 탐스러운 과일, 만개한 꽃. 정물은 이를 그림으로 그려 아름다움을 사유하고자 한 것이지만 정물을 들춰보면 마냥 밝은 속성만 있지는 않다. 일껏 만개한 꽃은 머지않아 볼품없이 시들어갈 운명을, 탐스러운 과일은 곧 변색하고 썩어 문드러져갈 시간까지 끌어안는다. 창문 틈으로 새어든 붉은 노을은 곧 밤이 다가오고 있음을 일러주기도 한다. 일찌감치 정물에서 중요하게 다룬 주제인 바니타스(Vanitas)가 가리키는 것은 허영과 덧없음. 

정물화는 이렇듯 가장 찬란한 한 시절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것이 맞을 쇠락과 죽음 역시 잊지 않으려는 달관이자 어느 한편으로는 낙관이기도 했다. 공승연이 여태껏 본 적 없는 선득한 낯빛으로 입술을 깨물었을 때, 정물이 간직한 섬뜩한 낙관이 겹쳐 보였다. 밝음과 어둠이 함께 있을 때 사물은 비로소 양감을 갖고,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 어느 한구석은 일그러져 있다. 생채기 하나 없는 예쁨은 시시하지만 흠결 있는 아름다움은 위엄이 있다. 공승연은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의 진아를 거쳐, <소방서 옆 경찰서>의 송설을 지나 쉼 없이 유연해지고 단단해지기를 거듭했다. 그렇게 공승연은 마침내 아름답고 깊어졌다. 검게 그을릴 때마다, 그윽해졌다.

드레스, 슈즈 모두 알렉산더 맥퀸. 네크리스 프트레이트리포트. 케이크 미소바케카케.

<소방서 옆 경찰서>로 큰 사랑을 받고 시즌2인 <소방서 옆 경찰서 그리고 국과수>로 돌아왔다. 송설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설이를 만난 게 2021년 겨울이니까 약 1년 반 동안 송설로 지낸 셈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캐릭터라 더욱 마음이 많이 쓰인다. <소방서 옆 경찰서 그리고 국과수>의 촬영은 모두 끝났지만 아직 방영 중이다 보니 마음속에서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했다. 신경수 감독님과는 <육룡이 나르샤> 때 만났는데, 나를 기억해주고 송설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먼저 제안을 해주셔서 굉장히 감사했다.

송설은 자의식이 강하지는 않지만 할 말은 꼭 할 만큼 강단이 있고 침착한 인물이다. 드라마에서는 평범하게 그려지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공승연은 어떤 사람인가? 송설과 닮은 면도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송설과 비슷한 건 사람을 좋아하고 내 사람을 잘 챙긴다는 것 정도. 나머지는 전부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이다. 송설과 함께하고 알아가면서 내내 존경했다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
한 가지 더 비슷한 건 나도 평상시에 감정이 막 요동치는 편은 아니란 거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예민하지도 않다. 배우로서 좀 더 예민하고 집요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데 처음엔 그게 잘 안 돼서 스스로 자책하기도 했다. 그런데 연기 경력이 점점 쌓이면서 나도 현장에서 최대의 능력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발동하는 예민함이 조금씩 있긴 하더라. 평소에는 그렇지 않은데 일에서만큼은 욕심도 부린다.

현장에서 욕심 버튼이 눌릴 때는 언제인가?
많은 배우들이 그렇겠지만 어떤 역할이라도 나의 캐릭터 해석에 완전히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처음 대본을 리딩할 때나 첫 촬영 때 감독님이나 다른 배우, 스태프들의 반응을 많이 살핀다. 그들의 반응을 통해 내가 하고 있는 게 맞다는 확신이 들면 짜릿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나를 좀 더 채찍질하게 된다.

원피스, 슈즈 모두 발렌티노.케이크 미소바케카케,문진 오브제 폴린루이스

데뷔 약 10년 만인 2021년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로 청룡영화상 신인상을 받았다.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는 2022년 SBS 연기대상 우수연기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그동안의 커리어가 인정을 받는 느낌이었을 것 같다.
정말 그랬다. 그동안 연기를 포기하지 않고 해왔다는 것에 대한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고생했다’ ‘잘했다’ 마침내 어깨를 한번 토닥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 이후로 어딜 가나 상과 작품 얘기를 해주어서 정말 흐뭇했다. 내가 해온 게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에서 공승연은 진정 의외의 발견이었다.
사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정말 고민이 많았고 어려웠던 작품이다. 그동안 상대방과 계속 대사를 주고받으며 감정을 표현하는 역할이 많았다면 진아는 타인과 소통을 피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인물이다. 혼자 이끌어가는 신도 많다 보니 정말 쉽지 않더라. 처음 시사회에서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도 내가 잘한건지, 못한 건지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근데 작품을 보고 주변에서 다들 너무 좋았다고 이야기해주더라. 어쩌면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 스스로 의심하고 고민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동안 맡았던 역할과도 결이 달라 작품을 선택하는 데도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나한테 들어온 게 진짜 맞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대본을 읽으면서도 내가 연기하는 모습이 안 그려졌다. 그래서 정중히 거절하려고 감독님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완전히 설득당했다. 나에게 충분히 진아의 얼굴이 있다며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감독님이 확신을 갖고 있었던 거다. 진아에 대한 의문이 드는 부분을 적어 갔는데 감독님이 하나하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감독님을 믿고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아는 대사도 감정 표현도 많지 않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 인물이 설득력을 얻은 건 진아 내면의 복잡한 감정이 공승연을 통해 전부 배어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아가 감정의 변화가 큰 인물이 아닌 데다, 또 영화가 시간 순서대로 촬영을 하는 게 아니다 보니 흐름과 감정선을 이어 나가기가 정말 힘들었다. 진아는 혼자서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인데 일상과 믿음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미묘한 변화를 맞는다. 매 신마다 감독님과 상의하고 대화를 하며 퍼즐을 맞추려고 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나의 혼란스러움도 결과적으로 진아란 복잡한 인물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진아에게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 무엇인가?
 거실이 있는데 왜 거실을 안 쓰나? 하는 사소한 것부터 정말 많은 부분이 그랬다.(웃음)

갑자기 MBTI가 궁금하다. ISFJ다.

감독에게 끈질기게 질문을 했다는 게 이해가 간다.
맞다.(웃음) 현실적인 S다 보니 스위치가 ‘딸각’ 하고 그 상황에 몰입하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항상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인물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적는다. 질문을 한번 쭉 나열한 다음에 그걸 해결할 때마다 하나씩 지워나가는 식이다. 대본에서 해답을 찾기도 하고 감독님과 대화를 통해 의문을 풀 때도 있다.

드레스 로크. 빈티지 거울 불필요상점.

과거 인터뷰를 보니 ‘공승연과 유승연을 분리하려고 한다’ ‘공승연으로 듣는 피드백을 유승연이 다 지고 가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을 했더라. 다짐은 잘 지켜지고 있나.
그 생각은 같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하는 건 여전히 훈련 중이다. 활동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본명인 유승연이란 이름을 쓸 때 더 낯선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유승연이 좋아하는 건 뭔지, 싫어하는 건 뭔지 그리고 지금 기분과 상태는 어떤지 계속해서 점검하는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떻게 노력하나?
오랜만에 먹은 음식에서 ‘아, 예전에 나 이 음식 참 좋아했지’라며 기억을 되뇌기도 하고 ‘고양이 팔베개 해주기’ 같은 사소한 취향을 메모해놓고 꺼내본다.

그렇다면 유승연이 좋아하는 것,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가? 
날이 더워서 취미가 망가지고 있긴 한데 원래는 집에 있는 작은 테라스에서 식물을 돌보는 걸 즐겼다.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며 상념에 잠기기도 하고. 얼른 날이 선선해져서 취미 생활을 하기만 기다리고 있다. 물론 <소방서 옆 경찰서 그리고 국과수>도 빠짐없이 시청하는 중이다.(웃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테라스를 즐기기 좋은 계절이 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