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계절
신록의 계절은 무릇 봄을 말하지만, 김신록의 계절은 밤의 온도가 차게 식고 흰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지금이다.
BY 에디터 장은지 | 2023.08.28.jpg)
레더 재킷, 쇼츠, 화이트 니트 톱, 이어링 모두 페라가모.
백로는 밤의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흰 이슬이 맺히는 때를 말한다. 공기 속 수증기가 응결해 물이 되는 것. 간단한 물리현상이지만 온도, 습도, 기압 어느 한 끗이라도 빗나가면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김신록은 한끗의 차이를 만들어 기필코 눈앞에 다른 세계를 펼쳐놓는 배우다.
<지옥>에서 뼈마디를 비틀고 뒤틀어 몸의 움직임만으로 절규를 뱉어내는 묵시록적 장면을 우리는 이미 목격하지 않았나. 김신록에겐 특유의 고딕스러운 분위기가 서려 있다. 늑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뾰족한 첨탑처럼 때때로 김신록이 가진 날것의 감각은 소스라칠 정도로 예리하다.
배우 김신록이 다른 세계와 접속하며 응결해내는 건 순결한 아침 이슬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소나무의 찢어진 피갑 사이로 배어 나오는 송진의 매혹에 가깝다. 닿은 것들은 전부 지독할 만큼 맹렬히 붙들고 늘어지는점성, 지배적인 박하 향을 비집고 나는 은은한 밤꿀의 풍미, 굳어진 화석이 호박 보석이 되는 정도의 비범함 말이다.
디즈니 플러스의 〈형사록 시즌2〉 〈무빙〉 그리고 〈유괴의 날〉 〈지옥2〉에 이르기까지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활동 중인, 아티초크의 단면처럼 끝없이 생경하고 다채로운 김신록을 만났다.

화이트 블라우스 셀프포트레이트, 블랙 스커트 막스마라, 슈즈 알렉산더 맥퀸, 이어 커프 포트레이트리포트, 링 비올리나.
김신록 배우를 인터뷰하려니 조금 긴장이 된다. 김신록은 적지 않은 시간 인터뷰어로 다른 배우를 만났고, 올해 초 그것을 엮어 책으로 출간하지 않았나.
그렇다. 25명의 배우를 만났고 〈배우와 배우가〉라는 인터뷰집을 출간했다. 〈지옥〉으로 큰 관심을 받으면서 연기에 관한 질문에 답할 때가 많았는데, 모든 배우들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했다. 〈배우와 배우가〉는 서울연극센터에서 운영하는 〈연극in〉이라는 웹진에 연재했던 인터뷰에서 출발했다. 그때 인터뷰와 1~2년 후 같은 배우를 한 번 더 만나 인터뷰한 것을 함께 실었다. 연기를 비롯한 모든 생각과 관점이 고정돼 있지 않고 계속 변한다는 것이 드러났으면 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마주 앉은 두 배우의 연기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이야기의 밀도에 압도되더라.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나?
연기 이야기를 하려 만난 거다 보니 ‘소셜’한 말들이 불필요했다. 시작부터 쉽고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눴다. 모든 인터뷰 내용이 당시 나에게 중요한 화두였지만 연기에 관한 생각은 쉴 새 없이 바뀐다. 나에게 〈배우와 배우가〉는 그 내용을 지금도 믿느냐, 지금도 유효하냐가 아니라 같은 질문에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음을 던지고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어떤 가이드로써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골드 드레스 에르마노 설비노, 쇼츠 손정완, 슈즈 구찌, 벨트 잉크, 이어링 비올리나.
김신록은 배우로서 연기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기를 가르치고, 배우고, 연구하고, 탐색하고, 사색해왔다. 이렇듯 다각적으로 탐구를 시도한 사람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연기란 무엇인가?
얼마 전 예전 제자의 연극을 봤다. <고등어>라는 연극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언제 이렇게 웃었나 싶을 정도로 박장대소했고, 어떤 장면에서는 마음이 시큰해졌다. 그렇게 공연을 즐기고 돌아가는데 제자가 문자로 “선생님에게 힘을 빼라는 조언을 많이 들어 신경을 썼는데 힘이 좀 빠졌냐”고 묻더라. 그래서 내가 말했다. 모든 게 다 좋았고 너의 믿음대로 하면 될 것 같다고. 그렇게 답하고 나니 연기는 이렇듯 자기 물음에 스스로 답하는 과정인 것 같더라.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그 물음에 답하고, 또 그 답에 대한 믿음을 밀어붙이면서 물음과 믿음을 끊임없이 새로 고침하는 것.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연기에 매혹된 순간이 궁금하다. 그것이 누구의 연기였는지도.
처음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운이 좋게도 최근에 그런 순간이 있었다. 며칠 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시사회에 다녀왔다. 작품적으로도 너무 훌륭한 작품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이병헌 선배의 연기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예전에 영화 <폴리스 스토리> 메이킹 필름을 보면 성룡이 헬기에 매달린 사다리를 잡으려 점프했다 거리가 조금 모자라니까 공중에서 도움닫기를 해서 사다리를 ‘팍’ 낚아채는 장면이 나온다. 메이킹이니까 CG도 아니다. 이병헌 선배의 연기를 보면서 문득 그 장면이 떠오르더라. 어떤 한 분야에 정통한 아주 소수만 이를 수 있는 경지가 그런 걸까 싶다. 너무 잘 알려진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한 발짝 더 치고 나아가 여전히 새로움을 줄 수 있는 정말 대단한 배우인 것 같다. 저렇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돼보고 싶다 생각했다.

레드 드레스, 볼레로 모두 잉크, 이어링 현케이.
<지옥>에서 ‘박정자’로 충분히 대단한 연기를 보여주지 않았나. <지옥>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를 꼽으라면 모두가 입을 모아 김신록을 말한다.
<지옥>은 주제나 형식 그리고 세계관 면에서 텍스트가 너무도 잘 구축돼 있는 작품이었다. 내가 맡은 박정자는 드라마 안에서도 모두가 주목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도 잘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디즈니 플러스의 <형사록 시즌2>가 얼마 전 종영했고 이어서 <무빙>이 막 오픈했다.
<무빙>은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문성근 선배와 꼭 함께 연기하고 싶어 출연을 결심했다. <형사록 시즌2>에서 만난 이학주 배우도 기억에 남는다. 시청자로 봤을 때도 그랬고 직접 현장에서 연기하는 걸 보니 정말 담백하게 연기한다는 생각이 들더라. 감히 평가하는 게 아니라, 나는 기질적으로 담백하지를 못해서 저 배우의 담백함은 어디서 나올까 하고 배우로서 호기심과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그 담백함의 정체는 뭘까?
글쎄, 그 사람의 기질과 역사와 연기에 대한 이해와 표현력 같은 여러 가지의 조합과 균형에서 오는 게 아닐까? 향과 간이 세지는 않은데 깊이도 있고 매력도 있다.
하반기에 작품 소식이 정말 많다. 드라마 <유괴의 날>도 방영을 앞두고 있다. <유괴의 날>에서 김신록은 '속을 알 수 없는 명준(윤계상)'의 전처로 나온다.
요새 나한테 들어오는 역할의 대부분이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다.(웃음) <유괴의 날>은 작품 소개에 ‘어설픈 유괴범과 11살 천재 소녀의 세상 특별한 공조를 담은 코믹 버디 스릴러’라고 나온다. 코믹, 감성, 휴먼, 드라마, 스릴러가 잘 버무려져 총천연색의 캐리커처 같은 느낌이 들 거다. 이번 작품을 통해 만난 윤계상 선배는 직접 만나보니 배우로서도 인간적으로도 정말 따뜻하고 근사한 사람이었다.

퍼플 드레스 알브이엔, 이어링, 링 모두 페이브.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 결국 좋은 배우가 되는 걸까?
혹자는 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한다고도 하고, 또는 나쁜 구석이 있어야 연기를 잘할 수 있다고도 한다. 어떨 때는 그렇고 아니기도 한 것 같다. 배우가 자기 자신을 재료로 쓰다 보니까 인격과 많이들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재료로 쓴다는 말이 흥미롭다.
요즘 연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인터페이스(interface)’란 말을 자주 하게 된다. 인터페이스는 상호작용을 뜻하기도 하지만 ‘접속하다’의 의미도 있다. 연기는 어떤 세계에서 오려져 나온 개별자를 연기한다기보다 그 인물이 연결된 세계와 그 관계를 끊임없이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배우는 자신을 재료로 외부 또는 내부 세계와 끊임없이 접속해야 하고, 배우가 해야 할 일은 결국 다른 세계와 접속할 수 있는 접촉면을 계속해 늘리는 일인 것 같다. 밖으로 면적을 넓힐 수도 있지만 종이를 구기면 그 속에 여러 면이 생겨나듯 안으로 확장해나갈 수도 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산책하는 모든 일상적인 시간이 접촉면을 늘리는 일이다.
배우 김신록과 인간 김신록이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몇 달 전 이사를 하면서 이전 집 거실에서 기르던 화분을 옮겨왔다. 이사한 김에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도 주고 빛이 잘 드는 베란다로 위치를 옮겼다. 그랬더니 갑자기 무슨 종의 변이라도 거친 듯 이파리가 2배 이상 커지는 거다. 이번 생에 못 다 피고 가려던 잠재력이 어떤 환경과의 접속을 통해 활짝 열리고 생명력을 발산하는 걸 지켜보니 너무 좋더라. 꼭 연기뿐만 아니라 어쩌면 산다는 건 여러 환경과 접속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뻗치며 변이를 일으키고 사는 게 아닐까 싶다. 나 역시 감사하게도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거실에서 빛이 잘 드는 베란다로 위치를 옮겨왔다고 생각한다. 좋은 환경에 놓였으니까, 이 환경과 잘 접속해 좋은 변화를 맞고 싶은 마음이다.
사진
주용균
스타일리스트
김미현
메이크업
박수연
헤어
박규빈
어시스턴트
양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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