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따라 강원도 여행

대지를 캔버스 삼아 우뚝 서있는 건축, 최첨단 기술을 만끽할 수 있는 뮤지엄, 우주가 만들어낸 예술 작품인 자연까지 가득한 강원도로 예술 기행을 떠났다.
BY 에디터 양혜연 | 2023.10.09
대지를 캔버스 삼아 우뚝 서 있는 건축, 최첨단 기술과 예술이 만나 만들어낸 한낮의 판타지, 그리고 우주가 만들어낸 예술 작품인 자연까지.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의미를 좇아 원주, 속초, 고성으로 떠났다.
뮤지엄 산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새로 오픈한 명상 공간인 빛의 공간의 모습
1 뮤지엄 산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새로 오픈한 명상 공간인 빛의 공간.
빛의 공간을 찾아서 ‘강원으로 떠나는 문화 예술 여행’이라 했을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뮤지엄 산’. 사실 동선상 원주는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다. 게다가 개관한 지 10주년을 맞은 뮤지엄 산은 이미 너무 익숙하다. 그럼에도 속초와 고성까지 좀 더 고생해서 갈지언정 뮤지엄 산을 코스에 넣은 것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공개된 ‘빛의 공간’ 때문이다. 서울에서부터 2시간, 오전 8시에 출발한 차는 정확히 10시, 미술관의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사방이 자연으로 둘러싸인 뮤지엄 산은 노출 콘크리트의 대가 안도 타다오의 설계로 공사를 시작해 빛과 공간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2013년 5월 오픈했다. 잔디 주차장이 있는 웰컴 센터에서 뮤지엄 산의 여정은 시작된다. 차를 세우고 나와 조금 걸으면 곧이어 조엘 샤피로, 세자르 발다치니, 에릭 오어, 마크 디 수베로 등의 작품이 오는 이를 반기는 조각 정원과 플라워 가든이 나온다. 이를 지나면 많은 이들이 뮤지엄 산 하면 떠올리는 거대한 붉은 조각, 알렉산더 리버만의 ‘아치형 입구’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본관에는 종이박물관과 미술관이 있고, 뒤편의 한쪽 길로는 명상관이, 다른 한쪽 길로는 스톤 가든이 이어진다. 그리고 조지 시걸의 작품이 길목을 장식하는 스톤 가든을 지나면 가장 마지막 코스 제임스터렐관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모든 걸 감상하기 위해서는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하기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안다 타다오-청춘 전시 일부 모습
2, 3 전시 <안도 타다오-청춘>에서는 그동안 안도 타다오가 진행한 프로젝트의 모형, 드로잉, 영상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그래서 뮤지엄 산을 방문한 가장 큰 목적인 빛의 공간에서 시작해, 이어지는 정원의 조각 작품들, 마지막으로 본관의 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안도 타다오-청춘>전을 감상하기로 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안도 타다오 본인이 설계한 공간에서 최초로 열리는 대규모 전시란 점에서 놓칠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방문한 빛의 공간은 2019년 1월 문을 연 명상관에 이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두 번째 명상 공간으로 올해 7월 공개됐다. 조각 정원에 위치한 빛의 공간의 긴 복도를 따라 들어가면 나오는 건 콘크리트 큐브, 그리고 천장에 뚫린 십자 형태의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빛이다. 개인적으로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 중 빛의 교회를 가장 좋아하는데, 마치 빛의 교회의 벽면이 위로 올라간 듯한 느낌이랄까. 미니멀했고, 그래서 좋았다. 마음속 큰 울림이 생기는 건 군더더기를 제거한 본질을 마주했을 때니까. 새하얀 빛줄기가 투박한 콘크리트 벽을 타고 내려오다 이내 어둠 속으로 스미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존재와 소멸의 불가분한 관계를 잠시 상기했다.
뮤지엄 산의 조각 공원의 모습
4 조각 공원에서 만난 마크 디 수베로의 ‘꿈의 실현’과 조엘 샤피로의 ‘무제’.
조각 공원은 간단하게 둘러보고 곧장 본관으로 향했다. 희귀 식물이 열 맞춰 심어진 오솔길은 걷다 보니 새삼 정말 서울을 떠났음이 실감난다.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흡수하며 도착한 본관에서 <안도 타다오-청춘>을 둘러보았다. 총 5개의 섹션으로 나뉜 전시 공간에서는 그의 첫 프로젝트인 스미요시 주택이라든가, 안도 타다오란 이름을 호명할 때 반드시 함께하는 나오시마 프로젝트, 비교적 최근작인 파리의 브르스 드 코메르스 등의 건축 모형, 드로잉, 관련 영상들을 감상할 수 있다. 자신이 설계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 스스로의 건축 생애의 전반을 돌아보는 전시는 그 자체로도 감동이다. 뮤지엄 산 주소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오크밸리2길 260 문의 0507-1430-9001 가격 기본권 대인 2만2000원, 소인 1만4000원, 미취학 아동 무료
동그란 책 내부 모습
5 서점 동그란책은 다양한 그림책과 소품류를 판매한다.
로컬 출판사 온다프레스에서 출간한 <동쪽의 밥상>
6 로컬 출판사 온다프레스에서 출간한 <동쪽의 밥상>.
옛 조선소에서 발견한 속초의 역사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알차게 뮤지엄 산을 둘러보고 향한 곳은 바로 속초다. 옛 조선소를 개조한 흥미로운 공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칠성조선소’는 1952년 원산조선소로 문을 열어 2017년까지 운영되던 곳을 리모델링해 만든 복합문화공간이다. 입구엔 장소의 역사를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전시 공간이 있는데 조선소를 운영하던 당시의 사진부터 낡은 도면, 선박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3개의 건물이 등장하는데 각각 뮤지엄, 카페 칠성조선소, 서점 ‘동그란책’이다. 뮤지엄엔 옛 공구를 비롯해 목선 하나가 놓여 있고, 목선 및 배 목수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적혀 있다. 세월이 지나며 새로운 재료로 배를 만들고, 이제 목선은 실용성을 상실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글의 말미 “내부에 전시된 목선은 2018년, 전용원 목수님과 함께 20여 년 만에 재현해본 작은 목선입니다. 어쩌면 속초의 마지막 목선일 수도 있겠습니다”란 문구를 보니 마음이 찡했다. 다소 앙상해 보이는 목선은 비록 이제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속초의 역사, 그리고 평생을 배 목수로 살아온 누군가의 삶을 증언하고 있었다. 칠성조선소 주소 강원도 속초시 중앙로46번길 45 문의 0507-1373-2309 가격 보트라테 7500원, 핫명란 6500원 뮤지엄 감상을 마치고 바로 옆에 위치한 서점 동그란책을 잠시 들렀다. 다양한 그림책과 소품들을 판매하는 이곳에 끌렸던 가장 큰 이유는 강원도 로컬 출판사 온다프레스의 책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온다프레스는 고성 바닷가 마을에 위치한 출판사로 지역의 특색을 담은 책을 출간한다. 몇 개의 책 중 속초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속초에서 살아온 엄경선 작가의 <동쪽의 밥상>을 골랐다. 영동 지역의 향토 음식을 매개로 이곳 사람들의 삶과 음식 문화를 다룬 책을 살피다 보니 슬슬 허기를 느껴 얼른 결제하고 건너편 카페 칠성조선소로 향했다. 메자닌 구조로 이루어진 커다란 카페 안에는 커피와 베이커리류, 다양한 굿즈를 판매한다. 우유와 연유를 섞어 하루 숙성시킨 음료에 에스프레소 샷을 부어주는 이곳의 시그너처 메뉴 ‘보트라테’와 소금빵 사이에 청양고추와 명란을 샌딩한 ‘핫명란’을 시켜 자리에 앉았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빵과 매콤함이 어우러진 핫명란 한 입, 그리고 한 모금만으로도 온몸에 당이 싹 도는 듯 달콤한 보트라테 한 입을 번갈아 먹다 보니 잠시 떨어졌던 에너지가 금세 차오른다. 동그란 책 주소 강원도 속초시 중앙로46번길 45 문의 033-673-2309
뮤지엄 엑스의 내부 모습
7, 8 첨단 기술로 구현한 미디어 아트가 곳곳에서 펼쳐지는 뮤지엄엑스.
최첨단 기술이 만든 멋진 신세계 이번 여행의 도시를 정할 때 중요한 기준점이 된 것은 바로 미술관의 유무다. 원주를 방문한 이유가 뮤지엄 산이라면, 속초에 들른 이유는 뮤지엄엑스다. 올해 8월 오픈한 뮤지엄엑스는 체험형 미디어 아트가 가득한 신개념 전시 공간이다. 가상현실, 인공지능, 홀로그램, 게임 등 가장 최신의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융합된 판타지 체험 라운지로 디지털과 아트가 만나면 과연 어떠한 것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를 오감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카페를 제외한 체험 스폿은 총 16곳이 준비됐는데, 빛으로 만든 화려한 패턴이 반복되는 터널 ‘ECHO’에서 전시가 시작된다.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미디어 아트가 볼만한 탄성반응 레이저 트램펄린, 그네의 포물선 운동에 따라 배경 그래픽이 적절하게 반응하며 완벽한 몰입감을 형성하는 가상그네, 관람자와 대화하며 초상화를 그려주는 휴머노이드 로봇까지 별천지가 따로 없다. 체험 공간은 특성에 따라 ‘공상 놀이터’ ‘시간의 여행’ ‘다차원 엠비언스’ ‘새로운 세계의 창작’으로 나뉜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시간의 여행 존의 ‘SYMPHONY’와 다차원 엠비언스 존의 ‘SURROUND’였다. 층고 7.5m에 달하는 ‘SYMPHONY’ 공간에서는 아름다운 자연, 선과 면으로 만들어내는 리듬감 있는 장면, 컬러가 너울대는 장면 등이 약 3분 단위로 바뀌며 끝없이 펼쳐지는데 온 벽을 뒤덮는 웅장한 규모에 압도된다. ‘SURROUND’는 원통형의 공간인데 천장의 거울 덕에 마치 무한히 위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거울에 반사돼 구체로 보이는 천장 중앙의 반구체는 마치 행성 같은 느낌을 줘 우주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을 누릴 수 있다. 기술과 관람자의 상상력이 만나 구축된 신세계는 눈을 감지 않고도 무한히 꿈꾸는 법을 일러준다. 뮤지엄엑스 주소 강원도 속초시 중앙로 340 문의 0507-1469-0396 가격 뮤지엄패스 대인 2만2000원, 소인 1만8000원
능파대 전경
9 조각 작품 같은 기괴암석이 군락을 이루는 능파대.
이스트사이드바이브클럽의 모습
10, 11, 12 고성 화재 때 불탄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이스트사이드바이브클럽에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낡고 자연스러운 것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것들을 한참 좇다 보니 어느새 여행 일정의 말미에 이르렀다. 마지막 방문 도시인 고성으로 향한다. 해안선을 따라 달려 도착한 곳은 ‘이스트사이드바이브클럽(이하 이사바)’. 2021년 오픈한 복합문화공간 이사바는 힙스터들의 성지다. 얼핏 보면 이번 여행의 테마와 결이 맞지 않는 듯 보일 수 있으나 내가 주목한 것은 공간이 품은 이야기였다. 2019년 4월 고성에서는 초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화마는 도시의 수많은 공간을 집어삼켰고 이사바의 건물도 그중 하나였다. 패션 디자이너이자 현재 이사바의 대표 박조니를 필두로 뜻이 맞는 이들이 모여 팔을 걷어붙였다. 불에 탄 건물 외관은 살리고 버려진 폐자재, 불에 탄 나무들을 모아 공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두 달의 시간이 지나 지금의 이사바가 탄생했다. 이사바의 공간은 크게 3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메인 건물은 전시장, 카페, 펍, 루프톱으로 이뤄져 있다. 지하 1층의 전시장은 이사바의 구성원들이 불타버린 건물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던 당시를 기록한 사진들을 전시한다. 얼핏 쓸쓸한 듯, 그러나 희망이 엿보이는 사진은 세상이 무용하다고 말하는 버려지고 낡은 것들도 충분히 가치 있고, 때론 새로운 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하는 듯했다. 1층에선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데, 메뉴판을 구경하다 고성 문어 버거란 이름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시그너처 음료인 밥말리 에이드와 고성 문어 버거를 주문했다. 음식은 건물 내부든 야외든 좌석이 있는 곳 어디에서든 먹을 수 있는데, 아쉽게도 여행 당일 비가 와 실내 좌석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먹는 것에 만족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메인 건물 바로 옆에 위치한 건물로 향한다. 메인 건물에 비해 비교적 작은 규모인 이곳은 패션잡화를 판매하는 LIFE 존과 포켓볼과 LP판, 턴테이블이 있는 PLAY 존으로 이뤄져 있다. 비록 방문한 날엔 직접 고른 LP를 듣지 못했지만 벽면을 장식하는 레코드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이사바의 마지막 공간은 바로 야외 마당이다. 동남아시아 분위기의 이곳엔 좌석이 마련돼 있어 메인 건물에서 주문한 음식을 즐길 수도 있고 때때로 파티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언젠가 날 좋은 날 다시 찾는다면 꼭 야외 마당에 앉아 칵테일 한 잔을 즐기겠노라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스트사이드바이브클럽 주소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광포길 31 문의 0507-1385-0881 가격 고성 문어 버거 1만2900원, 밥말리 에이드 7000원 어느덧 여행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대미는 우주가 만들어낸 예술 작품인 자연으로 장식하고자 했다. 고성의 아름다운 자연 스폿 중 고르고 골라 선택한 곳은 ‘능파대’다. 바다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엔 기암괴석이 군락을 이룬다. BTS가 ‘2021 윈터 패키지’의 화보와 영상을 찍으며 한 차례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러나 몇만 년의 세월 동안 이루어진 풍화 작용이 만들어낸 독특한 형태의 바위와 이와 맞닿은 바다의 모습은 어떠한 수식 없이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 불완전한 형태의 덩어리들이 불규칙하게 붙어 있는 모습이 어쩐지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기’ 연작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문득 과거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자신이 아끼는 소장품으로 ‘번역된 도자기’ 연작을 소개한 인터뷰이는 깨진 도자기들을 금으로 정성스레 이어 붙인 이 작품을 보면 실수투성이로 보낸 하루를 용서받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깨진 도자기처럼 불완전한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고. 파도와 무한히 부딪치는 까만 바위들을 바라보다 나의 불완전함을 껴안겠노라 다짐한다.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기 시작하듯, 세상이 말하는 무용한 것들도 그리고 언제까지고 불완전할 나라는 사람도 질문을 던지는 이 순간 이미 의미를 갖기 시작했으니. 여행의 시작점에서 품은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능파대 주소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괘진길 65 문의 033-249-3881

사진

안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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