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으로 지은 성

인생의 변곡점을 맞은 3명의 여인과 그들의 이름으로 지어올린 브랜드에 대하여.
BY 에디터 최윤정 | 2023.12.19
피비 파일로(Phoebe Philo)
어떤 분야에나 유독 누군가의 자아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마치 고유의 체취가 묻은 듯한 사람의 개성과 삶의 서사, 뚜렷한 인생관이 담긴 브랜드를 보면 곧바로 그 브랜드의 수장을 떠올리게 된다. 박수 칠 때 떠난 그가 돌아왔다.파일로-파일(Philo-phile)이라는 충성도 높은 고객을 거느리며 셀린느의 이름값을 높인 디자이너 피비 파일로가 공백기 5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딴 웹사이트를 오픈했을 때 ‘올드 셀린느’로 칭하는 그의 흔적을 채집하던 이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10월 30일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던 피비 파일로의 옷장이 열렸다. 반응은 엇갈렸다.
정공법을 택했다며 극찬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표했다. 평가가 어찌 됐건 A1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150여 개의 아이템은 11가지를 제외하고 (11월 14일 기준) 모두 솔드아웃됐다. 둥근 숄더 라인, 다리의 단점을 보완하면서도 우아한 미감을 잃지 않는 팬츠 실루엣, 발등을 덮은 구조적인 형태의 슈즈 라인, 선뜻 손이 가는 뉴트럴 컬러처럼 그녀는 꿋꿋하게 자신이 잘하는 것들을 내보였다.
런던 쇼룸에 인하우스 아틀리에를 구축하고 이곳에서 과잉생산은 지양하되, 퀄리티에 집중하는 것 또한 피비스럽다. 가정과 일의 균형에 있어 타협이 없는 올곧은 태도는 엄마를 뜻하는 단어 ‘MUM’을 모티프로 한 골드 주얼리를 보며 유효함을 짐작할 수 있다. 피비 파일로는 컬렉션 대신 에딧(Edits)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전개하는데, 이는 시즌에 구애받지 않는 옷을 선보이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독창적인 DNA가 부재했던 셀린느에서 그러했듯, 새하얀 도화지에 묵묵히 새로운 방식을 그려가는 이 여인을 추앙해 마지않는 이유는 이렇게 설명이 된다.
빅토리아 베컴(Victoria Beckham)
빅토리아 베컴은 브랜드 론칭 15년 만인 올해에야 적자를 벗어났다. 영국의걸그룹 스파이스 걸스의 멤버로 데뷔해 한때 ‘베컴 아내’로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그를 사업가이자 디자이너인 ‘빅토리아 베컴’으로 먼저 기억한다. 그는 2008년 9월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했고,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2011년까지 꾸준히 매출을 올리며 세컨드 라인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2013년 고비를 맞았다. 이어지는 하락세에 2019년 결국 남편 데이비드 베컴의 회사 DB 벤처스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고, 그해 1월 베컴은 한화 350억7638만원의 현금으로 빅토리아의 사업을 구제하며 한화 9억1503만6000원에 달하는 별도의 사업비를 빌려줬다고. 사업적으로 불안한 시기를 겪었던 건 분명하지만 이 과정에서 득도 있었다. 오랫동안 쌓아온 커리어만큼 이에 비례하는 노련함과 확신이 있었을 터. 결국 2011년 빅토리아는 영국 패션 어워드에서 올해의 디자이너로 선정됐고, 2017년 영국 여왕의 훈장까지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당장 매출에 성과가 없더라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빅토리아는 2019년 빅토리아 베컴 뷰티를 출시하며 뷰티 시장에도 출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2022년 파리 패션위크에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 브랜드가 흑자로 들어섰으니 이것은 분명 고비를 지나 탄탄대로를 걸을 거라는 긍정적 신호다. 빅토리아는 자신이 입는 스타일을 모두가 따라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양한 소비자를 겨냥해 스타일을 여러 방식으로 조합해 선보이는 게 패션 스타일링의 첫 번째 기준이라 여기기 때문.
이처럼 확실한 패션 철학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시그너처 스타일인 ‘Super simple, Elegant style(가장 심플하면서 우아한 스타일)’을 계속 재해석하고 재구성해가는 한편 이제는 매출을 의식하는 진정한 사업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올해는 드디어 수익을 냈어요. 특히 독립 브랜드의 경우 (수익을 내는 데에) 시간이 걸리죠. 이제 집의 기초를 다졌으니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될 겁니다.”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
올해 5월 할리우드 대표 배우인 그가 자신의 소신이 담긴 패션 브랜드 아틀리에 졸리를 선보인다고 밝혔다. 줄곧 사회적 활동에 앞장서온 그의 이 같은 출사표가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지금껏 보여준 의미 있는 행보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다. “거물급 패션 디자이너가 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는 집을 짓고 싶어요.”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이 소감처럼 아틀리에 졸리는 이름 그대로 재능 있는 창작자를 위한 브랜드이자 하나의 패션 스튜디오인 셈이다.
이곳에서는 전 세계에서 온 숙련된 전문 재단사와 패턴 제작사, 장인과 협업할 수 있고, 졸리의 신념을 담아 고품질의 빈티지 재료와 재고 원단만이 사용된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 장인을 위한 갤러리 공간, 난민 단체와 함께 운영하는 카페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자녀인 자하라와 팍스도 스튜디오 준비를 도왔다고 하는데, 이렇게 보면 앞서 언급한 두 여인까지 이들이 만든 견고한 브랜드에는 ‘가족’이라는 단단한 심지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작년 미국 특허청에 제출한 특허 신청서의 내용에 따르면, 아틀리에 졸리라는 상표는 맞춤형 보석부터 빈티지와 쿠튀르 의류, 패션 액세서리는 물론 핸드백과 신발, 가구까지 모든 가정용품을 포함한다고. 1년의 준비 기간을 거친 아틀리에 졸리는 끌로에와 함께 내년 1월 첫 번째 컬렉션을 론칭한다. 하이엔드 브랜드 최초로 친환경 기업 인증 비콥을 받은 끌로에와 같은 신념을 공유하며 데드스톡, 유기농 실크 등 천연 소재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소재로 컬렉션을 구성했다. 그리고 이 이벤트를 통한 수익은 난민 등 취약 계층을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거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쓰인다. 켜켜이 쌓인 아카이브에 휘둘리거나, 경영권을 쥔 회사의 간섭도 없으며, 스스로의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고 유행의 흐름에 맞서는 것. 최근 인생의 변곡점을 맞은 3명의 여인이 자신의 커리어를 다루는 방식은 이토록 단호하고 또 현명하다. 그들의 이름으로 지어 올린 성의 미래가 더욱 궁금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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