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의 판타지
섬광 사이로 스며 나온 김재영의 세계는 불투명하다. 나른하고, 강렬하고, 순수한 찰나의 장면이 겹쳐 자아내는 궁금증.
BY 에디터 정길원 | 2024.09.24
블랙 트위드 재킷과 이너 톱은 모두 베르사체, 네크리스는 다미아니.
오늘 카메라 앞에서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모델 활동할 때의 태도가 몸에 익은 탓인가. 나도 모르게 어릴 때 자주 하던 포즈를 하고 있더라.
그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을까. 제일 마음에 든 옷이 있었나?
마지막 옷. 반바지에 종아리 중간까지 올라오는 양말이 소년다운 분위기를 냈는데 그게 좋았다. 모델 일을 할 때 어느 순간부터 남성복을 많이 찍었다. 모델은 이미지가 중요해서 강한 인상의 남성복을 촬영하면 다른 분위기를 시도하기 다소 어렵다. 물론 아주 어릴 때 앳된 느낌의 옷을 입긴 했지만, 오랜만에 다시 입으니 소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아직 소년의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나 보다.
그런 것 같다. 항상 젊고 어리게 살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굳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일부러 더 어리게 행동하려고 한다.
어리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소통이나 관계를 잘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것.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와 인간관계를 맺거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정한 정답 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중심이 되곤 하는데 이걸 벗어나지 못하면 누군가와 트러블이 생기더라. 근데 촬영하다가 15세, 17세 차이 나는 어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와 비슷한 점이 많고, 배울 점도 많다. 표면적인 것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려고 한다.

트렌치 코트와 가죽 코트, 화이트 슬리브리스 톱, 데님 쇼츠는 모두 보테가 베네타.
열린 가치관이 역할을 선택하는 데에도 묻어나나 보다. <너를 닮은 사람>에서는 장발의 예술가였고, <월수금화목토>에서는 슈퍼스타였다. 그리고 곧 시작하는 SBS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에서는 열혈 형사.
열혈 형사라고 표현돼 있는데, 사실 내가 맡은 한다온은 감수성이 뛰어난 역할이다. 이번 작품은 판사 강빛나 몸에 들어간 악마가 한다온을 만나 죄인을 처단하는 SF 판타지 작품이다. 따라서 박신혜 배우가 맡은 강빛나는 인간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말아야 했다. 반대로 한다온은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을 많이 해야 했는데 이 부분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뉴스를 보면 슬프다는 감정이 들긴 하지만 정말 내 일이 아닌 이상 깊숙이 들어가진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은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만 공감 능력이 좋기 마련 아닌가.
MBTI가 INFP라고 하던데. 의외다.
일상에서의 공감과 연기에서의 공감은 결이 다르다. 연기에서는 내가 공감하는 걸 넘어서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그걸 시청자가 공감하게끔 만드는 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슬픈 게 중요하 기보다는 내가 슬프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그 외에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
악마라는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 가장 난항이었다. 처음에 감독님과 함께 어떻게 인간으로서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고 악마에게 마음이 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사실 그때 멘붕이 왔다. 실제로 볼 수 없는 걸 어떻게 믿어야 할까. 그래도 결과적으로 잘 나왔고 한다온이 판타지적인 배경과 시청자를 연결해주는 사람이 될 것 같다. 믿기지 않는 부분을 인간의 심리로 설명하는 역할이다.

블랙 슬리브리스 톱은 송지오 컬렉션, 블랙 슈즈는 캠퍼,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대본을 받고 출연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에 1~4부를 읽어봤는데, 한 번에 쓱 읽혔다. 일단 재밌었고, 권선징악이 확실해서 통쾌했다. 특히 악마와 인간의 조합이 신선했다. 과연 드라마가 어떻게 만들어질지, 영상으로 나온다면 흥미롭겠다 싶어서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본을 읽는데 그냥 너무 재밌었다.(웃음)
특히 처음으로 함께 호흡을 맞춘 박신혜 배우와의 케미도 기대되는데.
나보다 두 살 어리지만 아역 출신이라 훨씬 선배다. 처음엔 좀 어려웠는데 얘기를 나눠보니 그냥 또래 여자 동생이었다. 근데 촬영하면서 크게 배운 건 경력에서 오는 노련함이었다. 오랜 시간 촬영하며 힘들거나 짜증날 법도 한데 그런 감정을 굉장히 잘 통제하고 힘든 내색도 안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상대 배우로서도 더 힘이 난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데 정말 큰 도움을 준 친구다. 많이 배웠다.

블랙 슬리브리스 톱은 송지오 컬렉션.
배우로서 성장하려는 욕심이 보인다. 사진에서 단면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델과 달리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의 특성이 좋다고 한 옛 인터뷰 답변이 기억난다.
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작품을 하나 완성하는 데 7~8개월 정도의 시간이 든다. 그 시간 동안 한 인물을 파악하며 온전히 그 역할이 되려고 노력한다. 여러 인생을 간접적으로 살아볼 수 있는 점도 좋다. 이번 작품의 한다온은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끝까지 쫓고 책임지려 하는 모습이 있는데, 그게 참 남자답고 멋있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이게 맞는지 의심하기 마련인데 한다온은 지긋하게 꿈을 향해 간다. 그런 모습을 보며 다시 나를 되새기기도 하는데, 인물과 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좋다.
김재영에게도 그런 따듯한 마음이 있나 보다.
이 역할을 하며 많이 생겼다.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을 배웠다. 점점 이해하는 마음도 넓어진 것 같고. 나와 주변 사람 에게 더 따듯하게 대하려고 한다.
그럼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뜻일까?
전에는 상황이 잘못되면 빨리 끊어내거나 처리하려고 했다. 나에게도 엄격하고 타인에게도 엄격해서 정확하게 정리하려고 했다. 그래서 제일 많이 한 말도 ‘미안합니다’와 ‘감사합니다’였다. 작은 실수를 해도 빨리 사과를 해 상황을 끝내고 싶었고, 작은 선의를 받아도 빠르게 고맙다고 말했다. 이러면 서로에게 깔끔해지는 것 같았다.

블랙 슬리브리스 톱은 송지오 컬렉션,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신선한 발상이다. 보통 사과와 감사 인사는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지, 선을 그으려고 사용하는 말은 아니지 않나. 그럼 요즘 많이 하는 말은?
미안. 여전히 미안인가? 습관인 것 같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함께 촬영하는 친구들이 엄청나게 고생한다. 밤낮도 자주 바뀌어서 육체적으로 힘들다. 나도 그런 부분을 느끼는데, 다 같이 힘내서 해주니 항상 고맙고, 그래서 또 미안하다. 요즘에도 많이 한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진심이 느껴지는데. 어쩌면 이제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대화를 나눌수록 김재영은 끝없이 배우고 변하려는 사람 같다.
지금까지 살면서 해본 것도 많지만 동시에 못 해본 것도 매우 많다. 특히 연기를 하면서 이런 부분을 많이 체감한다. 최근에는 휴먼 멜로에 도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로맨스를 거의 안 해봐서.
좀 밝은 느낌을 원하는 걸까?
어두운 역할을 많이 맡았다. 이제는 좀 따듯하고 장난기 있는 캐릭터를 맡아보고 싶다.

블랙 트위드 재킷과 이너 톱, 블랙 팬츠는 모두 베르사체, 네크리스와 링은 모두 다미아니.
연기 말고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는?
영어! 세상이 빨리 좋아져서 다 통역이 되는 시대가 오길 바라며 살아왔다. 근데 영어를 잘할수록 기회가 많이 열리는 것 같다. 작품이 끝나면 과외도 한번 해보고 싶다.
그럼 이제 해외에서도 볼 수 있길 기대해야겠다.
그런 꿈까지는 없는데.(웃음) 사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연기자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물론 연기전공을 하지 않아서 여전히 어렵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혼자 이겨내야 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래도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선이 상대 배우와 딱 맞을 때 ‘이거다!’ 싶은 지점도 재밌고. 이젠 직업적으로 좋을 걸 더 많이 보게 됐다. 종종 내가 하는 것에 비해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냥 서서 대사를 말할 뿐인데. 그럴 때 이거 너무 좋은 직업 아닌가 싶다.

화이트 셔츠와 벨트, 블랙 팬츠는 모두 자개, 네크리스와 링은 모두 다미아니, 슈즈는 크리스찬 루부탱.
참 솔직하다. 이전 인터뷰에서 좌우명이 ‘초심을 잃지 말자’라고 답한 게 생각난다.
아 기억난다. 그 마음은 여전히 나에게 1순위다. 초심만 잘 지키면 나를 좋아해줬던 사람은 떠나지 않는 것 같다. 그게 나에게 큰 힘이 된다. 그리고 난 원래 이런 사람이었으니 이번에도 할 수 있다는 마음도 든다. 이를테면 다이어트. 지금은 좀 힘들기는 한데.(웃음) 40킬로를 감량한 내가 전에 얼마나 힘들게 운동을 했는지 생각하면 다시 할 수 있게 된다.
얘기를 쭉 듣다 보니 김재영을 지지해주는 울타리를 원하는 것 같다.
원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게 꿈이었다. 어릴 때는 20살에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근데 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가정을 꾸리는 게 쉽지 않다. 그래도 언젠가 내 울타리를 만들고 싶다. 그게 인생의 원동력이 될 것 같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이 생기는 느낌?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웃음) 가정을 꾸리는 건 여전히 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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