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비혼인들의 이야기
정치적 올바름 아니고, 신념 아니고, 선언 아니고, 그저 평범한 비혼인들의 이야기. 요즘 비혼인들이 비혼에 대한 생각, 그리고 바람에 대해 얘기했다
BY 에디터 장은지, 김화연, 이유진, 황보나현 | 2024.12.23
1. 일종의 팀플을 한다고 생각해요!
“네가 ‘확실한 비혼’이면 당연히 난 널 응원하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얼른 소개팅부터 해!” 한국의 정서상 과년한 나이(?), 만 34세의 내가 얼마 전 친구로부터 들은 말이다. 결혼 3년 차에 접어든 나의 27년지기 친구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대충 매직아이를 한 채 ‘그래, 그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실 묻고 싶었다. “대체 ‘확실한 비혼’이 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인생의 기본값으로 둔다. 그러나 나는 혼자인 것이 내 삶의 기본값이고, 결혼은 예기치 못한 변수라 생각한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내 삶을 뒤흔들 변화를 감내해서라도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면 결혼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 즉 내게 비혼은 선택하거나 선언하는 것이 아닌 자연발생적인 상태다. 이러한 생각은 꽤나 확고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흔들릴 때가 있다. 그건 먼 훗날 할머니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할 때다. ‘나중에 내 몸 하나 가누기 힘든 나이가 되면 어떻게 혼자 살아나가지?’ 불시에 닥친 이러한 생각에 도무지 잠이 안 오던 어느 날 나는 여성 커뮤니티에 노후, 비혼 따위의 키워드를 무작위로 검색했다. 비슷한 고민을 담은 글을 뒤적이던 중 머리에 종을 울리는 댓글을 하나 발견했다. “저는 비혼 인구들이 일종의 팀플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본주의는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으니 실버 산업도 훨씬 발전할 거고요.” 학창시절 그렇게 싫어했던 팀플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위안이 될 줄이야. 그제야 깨달았다. 나의 이런 불안감을 해소해줄 알맞은 처방은 결혼 열차에 탑승시켜줄 소개팅이나 선자리가 아니란 걸. 내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목소리를 한데 묶어줄 커뮤니티, 팀원들의 연대를 끈끈하게 해줄 법(예를 들면 생활동반자법 같은), 그리고 비약적으로 발전할 실버 산업을 누리기 위한 노후 자금이라는 사실 말이다.
- 불확실한 비혼주의자
2. 극 S의 비혼주의
‘정말 혼자 살 거야?’라는 질문에 농담처럼 ‘60살에 병수발 들어줄 10살 연하와 결혼할래’라고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찝찝합과 함께 ‘만약 내가 아프면 수술 동의서 보호자란에 누가 서명을 해주지’ 하는 고민이 독극물처럼 스멀스멀 퍼진다. 상상력이 부족한 극 S인 죄(?)로 말이다. 난 그저 혼자 살고 싶을 뿐이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해줄 사람이 없어 수술도 못 받고 죽고 싶은 건 아닌데! 최근 여러 기업에서 비혼과 관련된 새로운 복지를 도입하면서 사회적 인식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경제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의료 시설에서의 비혼자 권리 보장, 상속 및 재산 분배와 같은 명확한 법적 안전망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의식 없는 환자의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받기 위해 모든 환자를 일단 다 살려내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 비혼주의자 아닌 현실주의자
3. 비혼 당하는 남자, 그리고 여자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발표한 ‘서울시 성평등 언어사전’에는 ‘미혼’에 대해 ‘결혼을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겁니다!’라고 부연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비혼’을 자발적 싱글 상태로 규정하는 이들이 많지만, 때로는 비자발적으로 ‘비혼’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만난 게이 친구는 “결혼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동성 결혼이 허용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게이나 레즈비언은 결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자발적 싱글 상태가 아니라 비자발적 싱글 상태로, 본의 아니게 ‘비혼을 당하는’ 셈이다. 최근 ‘동성부부 건보자격’을 인정받은 커플은 ‘성소수자가 비혼 당하는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린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비혼 당하는’ 건 성소수자만은 아니다. 나 역시 비혼 당한 적이 있다. 지난해 친한 친구가 내 생일을 맞아 ‘비혼 축의금이야’라며 애플워치를 건넸다. 평소 생일 선물을 주고받지 않는 사이이기에 ‘비혼 축의금’을 빙자해 선물을 건넨 것이었다. 비혼 기간이 길어지면 이런 식으로 ‘비혼 당하는’ 경우가 생긴다. 솔직히 ‘그동안 뿌린 축의금은 어떻게 회수하지?’라고 생각한 적은 많았으나, 막상 ‘비혼 축의금’을 받게 되니 기분을 오묘했다. 때아닌 고가의 선물에 기분 좋기도, 친구에게 결혼 가능성을 부정당한 기분이 들어 머쓱하기도 했다. 나는 자발적으로 싱글을 선택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혼’, 즉 결혼하지 않은 상태가 반드시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선물을 받고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비혼’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상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문득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처럼 비혼 당하는 남자, 그리고 여자도 많다.
- 비혼 당한 남자

4. A . P . T
대부분까진 아니겠지만 그래도 상당수가 비혼으로 살면서 가장 큰 걱정은 지금이 아니다. 먼 미래다. 노후와 마지막. 쓸쓸한 죽음을 맞는 건 결혼을 해도, 아이가 있어도 그럴 수 있는 거고 꼭 비혼인만의 이야기는 아니니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후는 다르다. 나에게 노후는 두 가지로 나뉜다. 빈곤한 노후와 여유로운 노후. 노후에 마음 편히 누울 수 있는 아파트 한 채만 제대로 있어도 나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나라는 도무지 비혼인들에겐 아파트를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나라 청약 시장을 보자. 국가는 신혼부부나 다자녀가 있는 가정에 청약 가산점을 부여한다. 하지만 비혼들에게는? 어림도 없다. 열심히 돈 모으거나(이젠 불가능하다) 재테크를 활용해 집을 사는 방법이 전부다. 청약시장에서 한 타래의 비혼인들은 그냥 경쟁률만 높여주는 들러리 꼴이다. 3~4인 거주에 특화된 국민 평수 32~35형을 원하는 게 아니다. 18평형 수준의 평수에는 비혼의 가산점을 어느 정도 부여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혼자인 것도 서러운데 골골대는 몸 누일 집 하나 없으면 무슨 희망으로 살아가야 할까?
-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
5. 비혼의 전부
대한민국 땅에서 비혼으로 사는 일은 어떤가. 일단 엄마 아빠 이모 삼촌 상사의 “넌 결혼 언제 할 거야?”를 듣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애인이 없다? 이렇게 예쁜데 왜 없냐는 얘기까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야 한다. 진지하게 반격하는 순간 까딱하다가는 소개팅 자리가 잡히므로 나사를 반쯤 빼고 대답해야 한다. “이모, 알지? 난 손흥민 아니면 결혼 안 할 거라니까요?” 그러면 다들 웃고 만다. “주급 1억 밑으로는 제가 너무 아깝지 않냐”고 말하면 조금 더 빨리 비혼 토크를 끝낼 수 있다. 어른들에게 진지하게 비혼이 무엇인지 설명하다가는 왜 너에게 가족이, 남편이, 자식이 필요한지 한 트럭 들은 뒤 결국 벽에 대고 말하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비혼으로 사는 일은 정신을 살짝 놓고 모든 질문에 농담으로 대처하는 스킬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내 삶과 다짐은 농담이 아니기에 나는 내 삶을 농담으로 듣지 않는 사회를 원한다. 우스갯소리로 결혼 이야기를 치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애인 없이 홀로 삶을 살아가는 일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길 원한다. 다양한 가족 형태를 존중하며 서로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비혼이라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 분위기를 원한다. 비혼을 선택한 이후에도 가족을 꾸릴 수 있다. 혼인과 혈연 외에도 가족으로 인정해주는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면 된다. 그러면 함께 생활하는 누군가와 가족을 이루며 응급실에서 서로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다. 출산 장려 국가인 한국은 비혼인과 관련해서만큼은 꾹 닫힌 빗장처럼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특정한 길로 걷지 않으면 모두 경로를 이탈했다는 경보음을 울린다. 경보음은 끄면 그만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경보음을 끄고 있다. 내 삶이 내 삶으로서 존중받는 일, 그게 내가 원하는 비혼의 전부다.
- 결혼 한정 노이즈 캔슬링
6. 의도적 무심함이 필요한 시대
내게 결혼이란 이국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신념이 있어서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그냥 나는 모르는,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어떤 세계처럼 느껴왔단 말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못 만나서, 아직은 결혼할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돈이 더 필요해서 같은 변명거리를 찾아봤지만 100퍼센트의 구실이 되어주진 못했다. 그냥 ‘모르겠다’가 제일 적당한 핑계일지도. 그래서 누군가 내게 결혼에 대해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지금은 연애를 하고 있지만) 연애도, 결혼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나에겐 ‘혹시 비혼주의냐’는 질문은 쉽게 날아들었다. 비혼? 내겐 무슨 거창하고 혁명적인 선언처럼 들렸다. 반드시 결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결혼이란 스테레오타입의 결심도 하지 못한 내가, 어떻게 결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씩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유를 그냥 ‘모르겠다‘는 말로 뭉개버리는 것처럼. 언젠가 ‘평생 혼자 살기로 결정했다’고 넌지시 말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래, 너는 그런 결정을 했구나. 그럴 수 있지 하는 내게 친구는 “왜 이유를 묻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게 결혼이 인생의 대단한 무엇이 아닌 것처럼, 너에게도 너의 이유가 있겠지, 했다. 그러자 친구는 고맙다고 했다. 누군가에겐 비혼주의를 고백하면 그 이유를 어떻게든 찾아내 ‘치료’하려 들 때 늘 상처를 받아왔다고. 그래서 나는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렇듯 결혼에 대해서도 적당한 무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본다. ‘그럴 수도 있다’는 적당한 무관심, ‘왜 비혼을 택했는지’ 멋대로 넘겨짚지 않는 적당한 개인주의, 비혼/결혼주의의 여부에 대해 묻는 것이 무례한 일일 수도 있다는 의도적 무심함. 출근길 만난 동료에게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네요”라고 하는 것이 무례한 외모 평가일 수 있다는 걸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법이나 제도 같은 건 그 다음 문제고, 우리에겐 더 다양한 선택의 모양이 있다는 걸 알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 선택이 ‘이해’가 안 된다면 그냥 외우는 것도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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