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시장 리부트
120년간 서울의 로컬 미학을 대변해온 광장시장이 K-패션의 허브로 급부상하고 있다.
BY 에디터 양윤영 | 2025.11.11
북적이는 인파, 고소한 기름 냄새, 노점의 불빛이 반기는 서울의 한복판. 1905년 문을 연 한국 최초의 상설 시장인 광장시장은 오랜 세월 한복과 원단 등을 거래하는 전통 의류 도매상들의 거점으로 자리했다. 산업화 이후 잠시 활력을 잃기도 했지만, 1990년대 들어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며 다시 살아났다. 육회 골목과 빈대떡 노점, 마약김밥으로 대표되는 풍경은 오랫동안 서울의 로컬 미학을 대변해왔다. 이러한 시장에 최근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먹거리 중심의 상권이 패션과 뷰티를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 높은 유동 인구, 도심 한복판인 데 반해 낮은 임대료를 강점으로 하는 광장시장은 ‘진짜 한국’을 경험하고자 하는 외국인 수요와 함께 SNS, 유튜브를 통해 확산된 로컬 감성까지 더해지면서 아이코닉한 패션 성지로 떠올랐다. 특히 올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F&B, 뷰티, 패션 브랜드가 연속 진입하며 서울에서 가장 역동적인 유통 실험지로 급부상하는 중이다.


F&B에서 패션으로!
광장시장 변화의 불씨는 F&B 브랜드의 진출에서 시작됐다. 성수와 을지로로 대표되는 로컬 감성 상권의 흐름이 광장시장으로 확산되며 갈릭보이, 아베베 베이커리, 어니언 등 젠지 세대가 열광하는 브랜드가 잇달아 들어섰다. 올해 5월 문을 연 스타벅스 광장마켓점은 오픈 첫날 약 2000명 방문, 100명 이상 대기 행렬이 이어지며 시장의 새로운 전환점을 상징하는 사례로 떠올랐다. ‘시간을 추출하는 커피상회’라는 콘셉트로 한글 간판, 포목을 연상시키는 인테리어, 지역 아트워크를 반영한 매장은 전통시장 속 글로벌 브랜드의 상생 모델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 같은 변화는 곧 패션과 뷰티 산업으로 확산됐다. 같은 달 국내 최초 도심형 뷰티 아웃렛 오프뷰티가 개점하며 K-뷰티를 가성비 있게 체험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이어 7월 코닥어패럴이 합류했다. 전통시장 한복판의 글로벌 매장이라는 이색적 입지로 입소문을 타며, 오픈 3개월 만에 전체 고객 중 외국인 관광객 비중이 평일 기준 70%에 달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전통시장에 자리한 K-리테일이 외국인에게 ‘진짜 한국형 경험’ 으로 각인된 예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패션 브랜드들이 연달아 광장시장 상권 확보에 나섰다.

‘로컬’에 빠진 글로벌 브랜드
10월 1일, 젠지 세대에게 인지도가 높은 마뗑킴,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세터, 키르시, 프룻오브더룸 등 5개 브랜드가 광장시장에 동시에 문을 열었다. 매장은 서문에서 약 80m 지점, 기존 코닥어패럴 매장 옆에 약 661㎡(200평) 규모의 복합 공간으로 조성했으며 이는 유동 인구와 소비자 동선을 공유하며 집객 효과를 노린 결과다.
특히 마뗑킴 매장은 광장시장의 장소성을 로컬 맥락에 맞게 해석한 성공적 모델로 평가된다. 약 126㎡(38평) 규모의 매장은 그라피티 아티스트 범민 작가와 협업해 스트리트 무드를 구현했고, 서울 익스클루시브 라인과 한글 라인을 구성해 로컬 아이덴티티를 강화했다. 한글 로고가 새겨진 에코백과 볼캡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K-기념품 으로 인기를 끌며 SNS상에서도 주목받았다. 또 오픈 주간에는 박가네 빈대떡, 육회자매집, 순희네 빈대떡 등 광장시장 대표 맛집과 협업해 화제를 모았다. 맛집 직원 150명이 마뗑킴 로고 티셔츠를 유니폼으로 착용하는가 하면 갈릭보이와 함께 개발한 볼캡 모양 마늘빵을 한정판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마뗑킴의 사례뿐 아니라 광장시장에 입점한 브랜드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옛 시장에 내재된 ‘로컬의 미학’을 적극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레시피그룹의 세터는 광목천과 한지, 칸살 창문 등 한국적 소재로 전통 건축의 디테일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또한 레이어의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는 우드 톤과 미색 인테리어로 세련된 무드를 연출하며, 도심 속 새로운 콘셉트 스토어를 확보하고 있다. 하이라이트브랜즈 산하의 키르시는 다채로운 색감과 체험형 요소를 결합해 젊은 층을 끌어들였고, 같은 그룹의 프룻오브더룸은 174년 역사의 미국 헤리티지 브랜드답게 빈티지 마켓 콘셉트로 글로벌 무드를 더하기도 했다.

올드 앤 뉴, 이야기가 깃든 공간
럭셔리 브랜드가 전통에 주목하는 이유는 오래된 공간이 낡은 유산이 아니라 브랜드가 새로운 서사를 입힐 수 있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시간과 흔적이 켜켜이 쌓인 장소는 브랜드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다시 짜맞출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대다. 오래된 공간, 전통을 차용한 예시는 글로벌 패션 브랜드에서도 발견된다.
구찌는 2021년 이태원에 2번째 플래그십 스토어 구찌 가옥을 열었다. 서울의 전통 주거 공간에 착안한 가옥 개념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매장으로, 한지 질감의 벽면이나 목재 디테일 등 한국의 공간미를 담은 인테리어로 주목받았다. 같은 해 강남에서 포장마차 콘셉트의 애프터 파티를 열기도 했다. 미우미우는 2023년 청계천 일대에서 워크웨어와 산업 디자인을 모티브로 한 팝업 스토어를 진행했다. 노출된 철제 구조물과 공업용 자재, 조립식 선반 등을 공간 구성에 적용해 청계천의 산업적 정체성을 브랜드 세계관과 결합했다. 디지털이 지배적인 시대에도 소비자들은 여전히 장소가 가진 이야기에 반응한다. 공간이 오래될수록, 그곳에 누적된 시간의 층위는 브랜드가 새로운 의미를 입힐 여백이 된다. 광장시장이 패션 브랜드들에 매력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의 시간과 흔적이 쌓인 장소는 브랜드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짜맞출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대다.

공존을 꿈꾸는 상생형 리테일
광장시장 입점 브랜드들의 공통 전략은 시장의 역사성과 맥락을 흡수해 상생형 리테일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낡은 간판, 철문, 포목천 같은 공간 요소는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결합해 새로운 서사가 되고 상인과의 협업, 굿즈 개발, 체험형 이벤트는 소비자의 체류를 연장한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은 진짜 한국을 경험하면서 브랜드를 만나는 이중적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현재 동관 2층은 리모델링이 진행 중이며, 스타벅스 광장마켓점과 직접 연결돼 패션, 뷰티 복합 플랫폼으로 성장할 것으로 점쳐진다. 업계는 이곳을차세대 ‘2층 상권’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실제로 외곽 건물 권리금이 3억~5억원대까지 치솟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데이터도 이를 뒷받침한다. BC카드와 서울시 상권 분석은 광장시장을 집객력, 안정성, 성장성을 모두 갖춘 1등급 상권으로 평가했다. 성수나 명동처럼 상업화된 거리보다 로컬의 진짜 경험을 원하는 수요가 뚜렷하게 이동한 것.

새로운 실험장이 된 광장시장에도 여전히 과제는 남아 있다. 상권변화 속에서 신규 브랜드와 전통 상인의 공존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 광장시장 상우회 이부영 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유입이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분명하지만, 전통 업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상생을 위한 제도적 지원과 상인들의 운영 방식 개선이 병행될 때, 광장시장의 지속적인 활력 또한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1905년 한국 최초의 상설 시장으로 출발해 1990년대 먹거리 명소, 2020년대 관광지로 변모한 광장시장은 새로운 패션 명소로 3번째 부흥기를 맞고 있다.
사진
이소정, ⓒ Matin Kim, ⓒ Marithe Francois Girbaud, ⓒ Fruit of the 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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