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뷰티는 한국 목욕탕과 미용실에서 시작됐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출발점이자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자라나는 곳, 목욕탕과 미용실. K-뷰티의 역사는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시작된다.
BY 에디터 김초혜 | 2025.11.28
대중목욕탕 이미지
© 박현성
‘탕’과 한국식 미용 문화
엄마들의 최신 뷰티 트렌드는 늘 동네 목욕탕에서 나왔다. 보들보들한 피부를 만드는 때 마사지, 오이와 요플레 등을 이용한 신상 천연 팩부터 기가 막히게 살이 쭉쭉 빠지는 법, 건강한 먹거리 정보까지. 뿌연 수증기 속 벌거 벗은 아줌마들의 수다는 피부와 몸매 관리에서 시작해 아이들과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흐르다 오늘 저녁의 반찬 걱정으로 끝나곤 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대중목욕탕은 단순히 ‘씻는 공간’이 아니다. 한국인들에게 목욕탕은 만남의 장소였고, 특별한 날 몸과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찾는 상징적인 곳이었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가 공간이자, 동네 사람들이 오가는 작은 커뮤니티 역할도 했다. 특히 때밀이는 단순한 청결 행위를 넘어 주기적으로 ‘집중 관리’하는 문화였다. 때를 밀고,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목욕탕에서 피부를 가꾸던 루틴은 지금의 K-뷰티가 지향하는 여러 단계의 스킨케어 방법과도 무관하지 않다.
'목욕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여진 간판
© 박현성
목욕은 인간에게 가장 오래된 위생 행위이지만, 혼자만의 사적인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목욕탕은 단순히 때를 미는 장소에서 나아가 근대 도시의 형성과 함께 태어난 새로운 공공 문화의 상징이다. 수도와 온수시설, 공간 분리와 같은 인프라가 갖추어진 곳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함께 몸을 씻는다는 것은 이전 시대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 시대까지 사람들은 강가에서 멱을 감거나 집 안에서 간단히 목욕을 했다. ‘목욕’이라기엔 ‘목간’ 혹은 ‘멱감기’에 유사했고, 그것은 신체의 청결이라기보다 질병 예방이나 더위 해소를 위한 필요의 행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공중목욕탕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달라졌다.
현존하는 문헌 기록상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인 온양온천
현존하는 문헌 기록상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인 온양온천. 아산시 온천동에 위치하며 온천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 시대 세종, 세조 등 왕들이 온천을 위해 방문해 온양이라는 지역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24년 평양에, 1925년 서울에 각각 대중목욕탕이 생겼고, 이후 해방을 지나 산업화 시기로 접어들며 그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다. 지방도 마찬가지. 전남 진도 지역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문화목욕탕, 로얄대중목욕탕,프린스목욕탕 등이 문을 열었고, 일부는 30년 넘게 영업을 지속하며 지역 주민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었다. 동작구의 경우 1963년 노량진동의 용봉탕과 백노탕을 시작으로 1980년대까지 20개 남짓한 목욕탕이 생겼다. 이는 단순한 인프라 확장이 아니라 ‘공적 위생’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인식 변화의 반영이었다. 특히 1980~1990년대에는 사우나, 한증막, 노천탕, 냉탕 등이 복합적으로 갖춰진 목욕탕이 늘어나면서, 단순한 위생을 넘어 ‘건강’과 ‘여가’라는 새로운 가치가 목욕 행위에 덧입혀졌다. 2025년, 이토록 북적이던 대중목욕탕의 전성기도 이젠 옛이야기가 되고 있다. 시설은 낡아가고, 집집이 욕조를 두면서 반드시 밖에서 목욕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결정적으로 코로나19가 큰 타격이었다. 거리두기와 방역 규제 속에서 문을 닫는 목욕탕이 속출했고, 서울만 해도 불과 몇 년 사이 240개 넘는 대중목욕탕이 사라졌다.
싱글즈 12월 호 뷰티 변천사 관련 목욕탕 이미지
위_1971년 문을 연 서대문구 마을탕은 인왕산 자락에서 동네 사람들의 쉼터로 자리해온 전통 목욕탕이다. 아래_강서구 산호탕은 1980년대 서울 목욕 문화의 정취를 잘 간직한 공간으로, 가족과 이웃이 모이던 일상의 중심이었다. 두 목욕탕은 서울의 오래된 골목과 함께 몸과 마음을 데우던 공동체적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 박현성
<무한도전> 촬영지로 유명했던 원삼탕조차 결국 폐업이 결정됐다. 누군가에게 추억이었던 공간들이 통째로 사라진 셈이다. 대신 몇몇 탕은 리모델링을 거쳐 감성 카페로 바뀌기도 하고, 프라이빗 사우나나 테마 찜질방 같은 장소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대중목욕탕이 예전처럼 생활의 일부는 아닐지 몰라도, 여전히 ‘쉬어가는 곳’ ‘피로를 푸는 곳’으로서 또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
미스코리아와 동네 미용실
서울 조선호텔 미용실
1920년 한국 최초의 미용사 오엽주가 화신백화점에 미용실을 였었다. 이후 미용실은 전국 곳곳에 생겨나고, 신여성들이 그 확산에 앞장섰다. 사진은 서울 조선호텔 미용실. 샹들리에 덕에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단순한 외형 변화가 아니다. 마음의 정리를 뜻하기도 하고, 일상에 새로운 장을 여는 의식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보통 미용실이라는 공간에서 시작된다. 거울 앞에 앉아 누군가에게 나의 머리와 시간을 맡기는 경험은 생각보다 오랜 역사와 의미를 지닌다. 특히 195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미용실은 여성의 몸과 마음, 일상과 노동, 그리고 자립을 둘러싼 여러 층위의 삶이 교차하는 장소였다. 전쟁 직후, 수도와 위생 시설이 부족했던 시기에 머리를 집에서 감는 것은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다. 이후 미용실은 정보와 감정을 나누는 교류의 장이 됐다. 당시 여성들은 미용실에서 스타일을 실험하며, 트렌드의 변화를 피부로 느꼈다. 미용실은 단골이 생기고 단골과 가게 사이에 신뢰와 연대가 자라나는 일종의 사랑방 역할도 했다. 1950년대 중반, 명동에는 ‘허바허바 미장원’ ‘백난 미장원’ ‘스왕 미용실’ ‘버그 미용실’ 등 수십 개의 미용실이 들어섰다. 이처럼 한 지역에 밀집되면서, 미용실은 단지 미용을 제공하는 곳을 넘어 여성 소비 문화의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 미용실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관련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도 생겨났다. 대한양복수봉조합 연합회 부설 양재 학원, 서라벌 양재 전문학원, 마도로 백화점 부설 학원 등이 여성들에게 기술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설 기회를 제공했다. 미용사는 여성들이 비교적 쉽게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직업으로 자리 잡았고, 당시 여성지와 신문 광고는 미용사라는 직업의 전망과 창업 사례를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기술을 조금만 더 배우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힘이 됐다. 물론 미용과 양재를 ‘여성에게 적합한 일’로 규정짓는 담론은 가부장적이었으나, 그 제약 속에서도 많은 여성이 스스로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1936년 영화 <미몽> 속 동양미용실.
1936년 영화 <미몽> 속 동양미용실.
미용실이 늘어난 만큼 광고도 많아졌다. 신문과 여성지에 실린 미용실 광고는 단순한 미용 기술이나 스타일을 넘어 서양 문화와 근대적 감각까지 함께 홍보했다. ‘센추리’ ‘로렌’ ‘벨미’ 같은 명동 미용실의 이름은 ‘신여성’의 이미지를 덧입힌 마케팅 전략이었고,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적 상징이었다. 미용실은 단지 스타일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서양의 미적 기준과 미용 기술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이고, 이를 거리낌 없이 일상화한 실험장이기도 했다. 미용실은 한국 사회가 근대적 아름다움의 표준을 학습하고 내면화한 일종의 훈련소였으며, 이는 훗날 마스크팩, 필러, 스킨케어 디바이스 등의 최신 미용 제품과 기술을 쉽게 수용하는 문화의 토대가 됐다. 그러나 동시에 미용실을 드나드는 여성들은 종종 ‘사치스럽다’는 비판에 노출됐다. 한복을 고수하던 사람들에게 양장 차림과 미용실 출입은 지나치게 서구적이고 전통을 거스른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 같은 비판은 여성의 소비가 개인의 욕망에 대한 인지이자 사회적 주체로서의 자각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전근대적 사고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미용실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았다.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고, 기술을 익히며 삶을 개척해갔다. 오늘날 미용실은 대형화되며 한국 뷰티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미용실은 여전히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출발점이다. 공간의 크기는 변했지만, 그 안에서 ‘나’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다르지 않다. 어쩌면 목욕탕과 미용실에서 스스로를 돌보는 행위는 ‘뷰티 루틴’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오랜 시간 동안 일상에서 ‘몸을 다루는 기술’과 ‘변화를 수용하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체득해왔을 테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1일 1팩, 홈 케어 디바이스 등의 초개인화된 뷰티 루틴이 결국 우리의 오랜 문화 위에 기술이 더해진 결과물이란 뜻이다. K-뷰티의 진짜 힘은 우리가 평범한 일상을 누려온 시간 속에 있다.
K-뷰티의 역사
일제강점기 때의 경성 본정 거리.
일제강점기 때의 경성 본정 거리. 지금의 충무로는 당시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생활 중심지였다. 사진 왼쪽의 전봇대 뒤편으로 ‘이발관’이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이 눈에 띈다.
신기상회 기록사진
조선 내에서 고급 설비를 갖춘 이발관으로 알려져 있던 신기상회. 상점 1층에서는 이발 기구를 판매했고, 2층에는 이발사 16명이 상시 근무했다.
한국 뷰티 역사
1962년 서울 중구 방산동에 위치한 맘보이발관과 그 상가 일대.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성은 이용원을, 여성은 미장원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적 관습이었다. 당시 미용실은 단순히 머리를 자르는 공간을 넘어 지역 주민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곳으로 생활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한영수 작가의 <서울> 연작은
한영수 작가의 <서울> 연작은 1956년부터 1963년까지 한국전쟁 이후의 서울을 카메라에 담은 기록이다. 그가 약 10년간 남긴 사진들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표정과 감정을 담은 귀중한 기록물이다.

사진 출처

서울의 이용원(2022),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영상자료원, <大京城都市大觀>(朝鮮新聞社, 1937), 其他ノ部.

참고서적

<명동 아가씨> <서울의 목욕탕>

어시스턴트

정승연

케이뷰티
목욕탕
미용실
천연팩
스킨케어
대중목욕탕
한국미용문화
미스코리아
미장원
뷰티라이프
한국 스킨케어 변천사
케이뷰티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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