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서의 다채로운 모양

영화 <박열>에서 일본인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로 열연하며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최근 오른 두 연극에서는 동독 시절 감시 체제 안에서 고통을 감내하다 결국 파멸에 이르는 <타인의 삶>의 ‘크리스타 마리아 질란트’와 안톤 체호프가 만든 아름답고도 덧없는 <벚꽃동산>의 ‘강현숙’ 역을 맡아 단단한 여성 캐릭터로 큰 인상을 남긴 최희서가 20년간 치열하게 갈고 닦아온 다채로운 모양에 대하여.
BY 에디터 황보선 (프리랜서) | 2025.11.05
최희서의 싱글즈 11월 호 화보이미지
셔츠는 39만원 Juun.J. 모자는 32만원 Helen Kaminski. 재킷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최근 연극 <벚꽃동산>으로 해외 공연 투어를 다녀오셨다고요. 맞아요. 얼마 전에는 홍콩에 다녀왔고 곧 싱가포르에 가요. 저희 10명의 배우 모두 너무 친해서 약간 명절 가족 행사 같은 느낌으로 다니는데요, 그럴 수 있는 건 모두를 아우르는 도연 언니와 해수 오빠의 공이 크죠. 극 중에서도 가족 설정인데 정말 가족이 된 기분이에요. 연극 <벚꽃동산>은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희곡을 기반으로 하죠.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집을 통째로 무대 위에 세워둔 새로운 시도가 인상적이었어요. 엿보고 싶은 인간의 심리, 관음증을 인용한 연출이었는데, 그게 효과적인 이유는 관객은 집 밖에 있는데 집 안의 은밀한 대화나 귓속말이 다 들리기 때문이에요. 지붕 위, 지붕 아래, 집 안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죠. 한국에서는 재벌들의 이야기로 각색했는데요, 맡은 인물을 연기하면서 가장 중점에 둔 것이 있다면요? 원작에서는 ‘바랴’, 한국에서는 강현숙이라는 이름의 입양된 장녀, 소위 말하는 ‘K-장녀’의 표본 같은 역할이에요. 엄마와 삼촌이 가업을 너무 소홀히 하니까 그걸 떠맡아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하죠. 그와 동시에 동생도 돌보고 집안일도 하고요. 현숙의 의도는 꽤나 명확해요. 우리 집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이 여성이 회사에 얼마나 많은 걸 걸고 있을지, 회사가 파산한다는 건 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일지를 계속해서 생각하곤 해요.
최희서의 싱글즈 11월 호 화보이미지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1백40만원 Jinsun, 반지는 1천4백10만원 Repossi.
한 호흡으로 연결되기에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 연극 연기를 볼 때마다 늘 감탄해요. 배우의 입장에서는 어떤가요? 일단 그 세계에 들어가면 어떤 흐름이 생겨요. 상대 배우를 믿고 함께 따라가는 거죠. 그런데 그 흐름이 매일 매 공연 달라요. 같은 극일지라도 매번 다른 공연이 되죠. 이번 <벚꽃동산>을 하면서 도연 언니가 “매일 시작하고 매일 끝나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래요. 그래도 시작 전에 캐릭터를 이해하고 상대 배우를 믿으며 연습과 리허설을 잘 해두면 그다음부터는 완전 우리 무대거든요! 그런 재미가 있어요.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타인의 삶>이라는 연극 무대에도 오르셨죠. 다양한 인간 군상을 연기하면서 새롭게 느낀 지점들이 있을까요? 연달아 너무나 좋은 연극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는 건 큰 행운이에요. <벚꽃동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데,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 같은 이야기죠. 반면 <타인의 삶>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요. 동독 시절에 예술 활동을 하고 싶어도 감시 때문에 하지 못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죠. 제가 맡은 크리스타는 삶의 의지와 하고 싶은 연기에 대한 열정이 강한 배우 역할이었어요. 극에서 많은 심문과 고문을 받아야 해서 지금까지 했던 역할 중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웠고요. 그걸 64번이나 거쳤으니까 끝난 뒤에도 조금 후유증이 있었어요. 매일 심문을 받고, 매일 죽는 경험이라니… 매번 새로운 자신을 마주했겠네요. 작품마다 새롭게 깨닫게 되는 지점들이 있어요. 저는 본래 괴로움을 즐기는 사람이거든요. 사실 쉬우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쉬우면 그건 그냥 가벼운 스트레칭이죠. 준비 운동만 하다가 끝날 순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오래 뛰어야 하는 ‘러닝’ 같은 역할을 하면서 정말 고통스럽구나 하고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최희서의 싱글즈 11월 호 화보이미지
드레스는 가격 미정 Maison Nica, 레더 뮬은 2백1만원 Etro.
그간 맡은 인물에 공통점이 있어 보여요. 어떤 작품이나 캐릭터에 끌리나요? 처음에는 공감대가 많은 캐릭터에 관심이 갔어요. 그렇다고 늘 의지가 투철하고 열정이 가득한 여성만 연기할 수는 없고, 또 그런 연기를 하다 보면 전혀 다른 인물 군상이 궁금해지기도 하거든요. 그래도 확실한 건 내면의 여정이 다채로울수록, 인물의 처음과 끝이 많이 달라질수록 재미를 느낀다는 거예요. 그게 건강한 성장일 수도, 파멸일 수도 있겠죠. 연기를 처음 시작한 것도 연극 무대였다고요. 일본에 살 때 한인 학교에서 친구들과 <심청전>을 했어요. 심청이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고등학생 때는 뉴저지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연기 수업을 들었어요. 브로드웨이와 나름 가까워서 아역 배우 준비를 하던 학생들이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대학에 가면 연극을 하겠다고 결심했죠. 외국에서 지낸 유년 시절의 경험이 연기에 도움이 될 때도 있나요? 그럼요. 배우 줄리앤 무어가 10대 때 10번 정도 전학을 다녔다고 하더라고요. 그 경험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자양분이 된 것 같다고 이야기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저도 마찬가지예요. 연기를 한다는 건 새로운 상황에 처한 새로운 인물을 연구해서 체화하는 거잖아요. 심지어 언어조차 다른 환경에서 항상 눈과 귀가 보통 사람들보다 예민했던 것 같아요.
최희서의 싱글즈 11월 호 화보이미지
귀고리는 4만5천9백원 H&M.
그로부터 약 20년 뒤, 뉴욕과 뉴저지에서 찍게 된 미국 독립영화 <베드포드 파크>는 배우 최희서의 30대를 모두 쓴 작품이라고요. 제 30대의 숙제와도 같은 작품이었어요. 30대 초반에 캐스팅돼서 30대 후반에 찍었거든요. 저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을, 손석구 배우는 전직 레슬러 역할을 맡았어요. 큰 상처가 있는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치유하는 이야기인데 대본을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이건 꼭 해야겠다’였고, 두 번째는 ‘상대 배우가 손석구라면 너무 잘 어울리겠다’였어요. 그런데 원래 설정은 백인이었거든요. 손 배우와는 이미 여러 번 작업했기 때문에, 믿음이 있었어요. 감독님을 설득해서 코로나19를 지나 우여곡절 끝에 올해 초에 함께 촬영하게 됐죠. 관객들이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면 좋을까요?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한국 배우가 이 영화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고 느끼실 것 같고요, 저희의 케미스트리도 기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다만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고 진솔하고 진득한 사랑 이야기예요.
최희서의 싱글즈 11월 호 화보이미지
재킷은 4백29만원, 스커트는 3백59만원 모두 Erdem, 이어 커프는 26만9천원 Tom Wood.
배우뿐 아니라 쇼트 필름 프로젝트 ‘언프레임드’ 중 <반디>의 연출자로 나섰던 적도 있죠. 앞으로 감독으로서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시나리오 2개를 쓰는 중인데 하나는 정통 화법으로 1930년대 실존했던 여성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다른 하나는 약간 실험적인데,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옴니버스로 묶어보고 싶어요.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 책을 낸 적도 있어요. 최근 마음에 품고 있는 문장이 있다면요? 어제 공연을 보러 이해랑예술극장에 갔어요. 이해랑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르네요.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우주처럼 광활하고 표현은 반짝이는 별처럼 압축되어야 한다.” 이건 모든 예술가에게 통용되는 말 같아요.
최희서의 싱글즈 11월 호 화보이미지
비즈 프린지 스커트는 가격 미정 Ports, 타이츠는 가격 미정 Arket, 슬링백 펌프스는 가격 미정 Ferragamo, 귀고리는 4만5천9백원 H&M,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배우는 연기뿐 아니라 매일 많은 사람과 협업하며 살아가죠. 직업인으로서의 최희서는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웃으면서 들어가고 웃으면서 나오고 싶어요. 결과도 중요하지만, 저는 과정 자체도 중요한 사람이라서요. 현장의 모두가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일상 속에서 배우 최희서가 가장 행복을 느끼는 때가 있다면요? 아침에 창문을 열고 커피를 마시는 순간이요. 그때는 휴대폰도 보지 않죠. 오전 6시에 현장에 가더라도 1시간 전에는 일어나서, 꼭 그 10분은 지키려고 해요. 벌써 올해가 세 달밖에 남지 않았더라고요. 남은 시간 동안 이루고 싶은 계획이 있나요? 글을 쓰고 싶어요. 지금 35페이지 남짓 썼는데, 55페이지 정도는 해내고 싶네요. ‘자체 마감’

사진

신선혜

헤어

조미연

메이크업

고미영(아티시차차)

스타일리스트

김지원

최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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