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박스’라는 작은 사회

“스티커 붙이는 센스는 인생의 센스이기도 한 거다”라는 영화 속 대사의 유효 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인형계, 키링계, 포카계, 다꾸계, 포장계까지…. 1984년생 아트박스가 새삼 주목받는 이유.
BY 에디터 김화연 | 2026.02.11
아트박스 문구류 이미지
writer 임나리 서울을 기반으로 동시대 한국 디자인을 소개하는 ‘워키토키 갤러리’ 대표이자 콘텐츠 기획사 ‘워드앤뷰’ 디렉터. 사물, 공간, 라이프스타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다양한 콘텐츠를 잇고 연결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일에 애정이 크다.
나에겐 14살, 11살인 두 딸이 있다. 11살인 둘째는 주말마다 아트박스에 가고 싶다고 조른다. 아빠를 앞세워 친구들과 함께 아트박스 신촌에 다녀온 날 둘째는 ‘우정템’으로 맞추었다며 초록색 외계인 인형을 보여주었다. ‘끼링까링꿍’이라는 다소 요상한 캐릭터 이름에 의구심이 들었지만, 요즘 네이밍 감각이라 여겼다. 아이들은 ‘끼링까링꿍’ 카톡 단톡방을 만들고 눈이 위로 올라간 초록색 인형의 다양한 연출 사진을 계속 올렸다. 이 인형은 아이들의 일상을 함께하는 증인이었다. 놀이터에도, 학원에도, 식당에도 합석했다. 둘째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온통 ‘인형계’다. 나는 이 단어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인형계가 인형의 세계라는 거야?” 둘째는 활짝 웃었다. “엄마 매일 내가 책상 앞에 앉아 만들고 사진 찍는 게 다 인형계야!” 정확히 말해 인형계는 인형을 자식처럼 아끼며 음식, 목욕, 잠자리 같은 일상 돌봄을 연출해 그 과정을 SNS에 올리는 놀이이자 콘텐츠였다. 밀가루와 플레이콘으로 만든 미니 음식 모형을 인형에게 먹이는 장면 때문에 방 안이 난장판이 된다고 부모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인형계의 ‘계’는 단순히 ‘계정’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아이의 시간을 기세 좋게 장악하고 있는 쇼츠들을 보고 있노라면 ‘계’는 하나의 세계이자 커뮤니티에 가까워 보였다. ‘끼링까링꿍’의 원래 이름이 아트박스의 PB 캐릭터 ‘게왹이’라는 것을 뒤늦게 오프라인 매장에 가고 나서야 알았다. ‘지구에 귀화한 외계인 1호 게왹이’에게 아이들은 자신들이 궁리한 이름을 별도로 붙여주고, 아주 성실하게 공동육아를 하고 있었다. 게왹이와 아이들 사이에는 관계가 형성됐고, 소소하게 쌓인 관계 속에서 감정이 움텄으며, 서사가 생겼다. 산리오 캐릭터와 다르게 게왹이는 어딘가 조금 삐딱하게 귀여웠다. 둘째가 인형계에 빠져 있을 때, 첫째는 포카(포토카드)계와 다꾸(다이어리 꾸미기)계에 중독됐다. 포카 전용 플랫폼인 포카마켓이나 중고 거래의 장인 번개장터를 통해 자신이 애정하는 ‘보넥도’ 운학의 포카를 얻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아직 만 14세 미만인 첫째는 엄마 핸드폰에 거래 앱들을 다운로드해 사용하며 매일 편의점에 ‘반택’하러 간다고 했다. 나는 이 단어를 이해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반품 택배가 아니라 편의점 지점 간 택배로 가격이 저렴해 ‘반값 택배’라 불렸다. 포카를 교환하는 작은 택배에는 사탕, 쿠키 같은 간식과 함께 덕질을 응원하는 쪽지가 동봉돼 있었다. 작은 택배 상자는 일종의 정서적 교신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아이돌의 사진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고, 그 작은 카드들은 지금 세대가 관계를 이어가는 하나의 형식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문방구와 슈퍼마켓을 드나들 듯 아이들은 어느새 아트박스, 다이소, 올리브영, 편의점의 단골이 돼 있었다. 용돈이 한정적인 아이들에게 아트박스는 고급 소매점이고, 다이소는 뭐든지 쉽게 살 수 있는 소매점이며, 올리브영은 사춘기 진입과 함께 관심이 확장된 소매점이다. 편의점은 가장 편안한 약속 장소로 이제는 집 다음으로 익숙하다. 아이들은 이 장소들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아이들이 아트박스 같은 매장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귀여움이라는 감정에 대한 본능적 집중이 있다. 인형, 포토카드, 스티커, 다이어리 같은 손으로 다루는 작은 대상은 통제 가능해 위험 요소가 없다. 부드럽고, 안전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며 해치지 않는다. 관계적 상처를 주지 않는 안온한 세계다. 아트박스 같은 곳에서 아이들은 인형계, 키링계, 포카계, 포장계 등 귀여움을 담당하는 모든 계정을 묶어 한 번에 만날 수 있다. 외국인에게 어쩌면 아트박스는 단순 문구점 이나 기념품 숍이 아니라 한국 귀여움 산업의 집약체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소싯적 문방구 죽순이였다. 1980~1990년대 초등학교를 다닌 나는 매일 학교 앞 모닝글로리를 들락거렸다. 등굣길에 들렀다가 하굣길에 다시가고, 학원 가는 길에 또 갔으며, 놀이터 갔다가 귀가하기 전에도 방문했다. 프라모델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나의 책상에서 벌어질 학습이라는 퍼포먼스를 보여줄 각종 학용품의 형형색색에 매혹됐다. 그것은 나만의 소비재에 대한 갈구였다. 교복 입던 시절에는 여느 10대처럼 HOT와 젝스키스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멈출 줄 몰랐기에 철새처럼 아이돌을 옮겨 다녔다. 당시 패션 잡지나 연예인 잡지를 사면 굿즈를 주었다. 굿즈는 잡지의 부록 같은 개념이었다. 아이돌의 브로마이드를 받기 위해 잡지를 사고 방의 벽면을 ‘오빠들 사진’으로 채웠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 집에 갔다가 당시 중학생이던 친구 언니가 윤상 팬이라며 방 안을 윤상 사진으로 도배한 걸 봤었는데…. 11살은 차마 헤아릴 수 없던 세계가 17살이 된 내게 펼쳐졌다. 나는 잡지에서 아이돌 사진과 패션 화보를 찢어 교과서 커버와 자체 제작 필통 패키지로 활용했다. 일종의 콜라주였다. 좋아하는 마음이 하나하나 오려지고 이어지고 붙여져 ‘구성’됐다. 이쯤에서 나의 굿즈 세계는 더 이상 갱신되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한 뒤 친구들이 텐바이텐과 1300k, 교보 핫트랙스에서 차곡차곡 적립금을 쌓을 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귀여움에 더 이상 돈을 쓰지 않았다. 20대의 나를 사로잡은 건 외롭고 혼돈스러운 ‘멜랑콜리’한 감각이었으며, 방랑과 불안이었다. 20년이 지나 나는 귀여움이란 세계를 내 아이들을 통해 다시 접속한다. 첫째는 응원봉을 사고, 포토카드 앨범을 만들며, 6공 다이어리를 각종 스티커로 장식하고, 가방에는 좋아하는 캐릭터와 아이돌 관련 키링을 단다. 책상 위 문구에서 삶의 구석구석 라이프스타일 굿즈로 귀여움은 야금야금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굿즈는 단지 굿즈가 아니다. 감정과 취향이 담긴 이 굿즈는 연결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내 아이들을 보다 보면 문득 궁금하다. 왜 이렇게 ‘꾸미기’와 ‘만들기’에 진심일까? 이 작은 것들을 붙이고, 떼고, 만들고, 갈아입히는 데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감정을 쏟는 걸까?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의 유명한 대사 “스티커 붙이는 센스는 인생의 센스이기도 한 거다”의 유효 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아이들은 귀여움이라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명명하고 일군다. 그 안에서 감정은 비로소 모양을 갖추고, 관계는 연습되고, 세계는 축소된 형태로 작동한다. 아트박스는 아이들의 세계를 구성할 재료를 무한히 공급하는 곳이다. 단순히 작은 물건을 파는 팬시 문구점이나 라이프스타일 편집 매장이 아니라 아이들이 감정을 표현하고 교환하는 언어를 제공하는 플랫폼에 가깝다. 다이어리 한 페이지, 스티커 하나, 인형에게 차려 주는 작은한 끼가 오늘의 감정을 붙들어준다. 그러나 아이들이 귀여움에 머무르는 이유는 단순히 기쁨과 위로를 원해서가 아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온라인 평판을 관리해야 하고, 딥페이크 걱정 때문에 사진 한 장도 편하게 올릴 수 없으며, 디지털 속에서 친구 관계도 증명해야 한다. 현실은 일찍 무겁고, 빠르게 복잡해진다.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 가능한 가장 작은 크기의 세계, 스티커의 반짝임과 인형의 체온으로 유지되는 세계에서 먼저 감정과 의견을 교류한다. 귀여움은 갈수록 더 정교해지고 고도화된다. 인형계, 포카계, 다꾸계, 포장계…. 감정을 더 촘촘히 다루기 위한 세분화된 장르들이 생기고, 아이들은 그 장르 안에서 자신만의 언어와 규칙을 만든다. 1984년 설립돼 여전히 사랑받는 아트박스의 가치도 여기에서 나온다. 이곳은 물건을 파는 가게라기보다 귀여움을 계획하고 생산하며 유통하는 작은 사회다. 40년 넘게 아트박스가 유효한 존재로 남아 있는 이유는 귀여움이라는 감정이 시대마다 새롭게 재조합되며, 사람들 속을 파고드는 힘과 변화를 견디는 유연성을 동시에 지닌 감정 자산이 됐기 때문이다.

임나리

사진

박종원, 박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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