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브랜드가 향수에 주목하는 이유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가장 오래 남는 무언가. 패션 하우스가 향수 사업에 뛰어든 이유.
BY 에디터 양윤영 | 2026.02.13만약 우리가 비슷한 세대를 공유하고 있다면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 제국의 역습>을 기억하는지 묻고 싶다. 작품에서 짱구의 아빠 신형만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일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은 채, 잊고 지냈던 감정과 풍경 속으로 깊이 젖어든다. 일명 ‘프루스트 현상’이라 하는 후각 기억의 전형적인 장면이다. 시각이나 청각과 달리 후각은 이성적 해석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향은 설명보다 빠르고, 논리보다 깊다. 향수가 라이프스타일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향수는 상쾌함을 유지하는 도구인 동시에 자기만의 스타일을 표현하는 비가시적 언어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말하지 않아도 각인된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확산한 스몰 럭셔리 문화와 맞물리며 니치 향수 시장은 가파르게 성장했다. 이제 향은 단순 소비재를 넘어 감정을 축적한 개인의 취향이 됐다.
“사람이 죽고 난 뒤나 물건들이 없어진 뒤 예전 기억들은 하나도 남지 않더라도 비범한 영혼들처럼 냄새와 맛은 홀로, 그리고 약하지만 생동감 있게, 비물질적이지만 지속해서, 항상, 믿음직스럽게 우리 삶을 오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남아 있는 모든 파편 조각을 기억하고 기다리며 희망하며, 비현실적으로 자그마한 항아리 속에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엄청나게 큰 기억의 덩어리를 담고서는 이고 지고 갈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패션 하우스가 향수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78년 만에 향수를 재출시한 발렌시아가를 필두로 질샌더, 보테가 베네타, 꾸레쥬 같은 하우스 브랜드는 물론 코스와 오니츠카타이거 등 대형 리테일 기반의 패션 브랜드와 중저가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향수 사업에 뛰어든 패션 브랜드
최근 패션 하우스들은 향수를 단발성 라이선스 상품이 아닌 하나의 카테고리로 재정의한다. 대표 사례가 발렌시아가다. 발렌시아가는 2025년 9월, 10가지 향으로 구성한 프래그런스 컬렉션을 공개하며 78년 만에 향수 사업으로의 복귀를 알렸다. 특히 1947년 첫 향수 ‘르 디스(Le Dix)’의 플라콘을 정밀 스캔해 유리 캡과 리본 등 디테일까지 재현한 방식은 패션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향으로 바꾸는 전략에 가깝다.
꾸레쥬는 7가지 젠더리스 향으로 브랜드의 이미지와 감각적 물성을 연결한 ‘더 컬러라마(Colorama)’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는 메종의 정신을 상징하는 바이닐 재킷의 컬러와 텍스처에 영감을 받은 까닭으로 향의 구성 자체에 패션의 태도를 녹인 것이 특징이다. 잘 팔릴 만한 향보다 하우스의 실루엣을 구현하는 방식에 집중한 결과다. 질 샌더 역시 ‘사람이 옷을 입듯 향기를 입는다’는 개념 아래 오래된 잔향과 미니멀한 구조를 강조한 라인을 공개했다.
보테가 베네타는 보틀을 하나의 인테리어 오브제로 인식해 군더더기 없는 형태의 디자인을 선택하는 등 향수 비주얼과 물성이 브랜드 이미지와 맞물리도록 했다. 중저가 브랜드의 사례도 눈에 띈다. 오니츠카타이거는 조향사와 협업해 브랜드 시그너처 컬러를 입힌 보틀로 4종의 오 드 퍼퓸 컬렉션을 발표했다. 대형 리테일 기반 패션 브랜드도 향수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코스는 2025년 4월 자체 브랜드 코스 퍼퓨머리를 론칭하며 4종의 오 드 퍼퓸과 디스커버리 세트, 트래블 사이즈 등 레이어링과 휴대성을 고려한 구성을 내세웠다. 이는 향수를 하나의 컬렉션처럼 운영하는 최근 하우스들의 전술과 닮았다. 제품 자체뿐 아니라 세트, 리필, 휴대형 등 사용 시나리오를 확장해 재구매 접점을 늘리는 방식이다.
한국 패션 업계에서도 패션과 향수의 교집합이 점차 커지는 추세다. 국내 주요 패션 기업들은 기존 플랫폼을 넘어 뷰티·라이프스타일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향수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2014년 스웨덴 브랜드 바이레도를 필두로 딥티크, 산타마리아노벨라 등 유수의 니치 향수 브랜드 판권을 확보해 국내에서 전개해왔다. 최근에는 영국의 럭셔리 향수 힐리와 이탈리아 브랜드 쿨티의 국내 독점 유통 계약까지 체결하며 라인업을 확대했다. 이를 통해 신세계인터내셔날은 많은 고급 향수 브랜드를 확보하며 니치 향수 시장 내 영향력을 키우는 중이다.
한섬은 2022년 프랑스 니치 향수 편집숍 리퀴드 퍼퓸 바와 한국 독점 유통 계약을 체결하고 어비어스, 비디케이, 레짐데플뢰르 등 소규모 생산 니치 향수 브랜드를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또한 현대백화점 판교점을 시작으로 더 현대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 등 백화점 주요 지점에 리퀴드 퍼퓸 바 매장을 운영하며 오프라인 접점을 강화해왔다. LF 역시 프랑스 니치 향수 편집숍 조보이(JoBoy)를 국내에 들여오며 플랫폼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 패션 기업들은 니치 향수 시장의 성장세를 기회로 삼아 해외 프리미엄 향수 브랜드를 유치하거나 국내에 적합한 편집형 매장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패션 비즈니스의 새로운 캐시카우
패션 브랜드가 향수에 집중하는 데에는 구조적이고 철저한 계산이 바탕에 깔렸다. 의류는 시즌과 사이즈로 인한 재고 부담이 크다. 반면 향수는 체형의 제약이 없고 계절에 따른 변동성도 상대적으로 낮다. 제품 수명 주기가 길고, 재구매 가능성도 높다. 유통 구조 역시 매장, 온라인, 면세점 등으로 확장이 수월하다. 브랜드 입장에서는 매출 구조를 안정화할 수 있는 카테고리로 여겨진다. 실제로 국내 시장은 빠르게 성장 중이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국내 향수 시장 규모는 2018년 약 5152억원에서 2023년 9000억 원 이상으로 성장했으며, 2026년에는 1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시장 역시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고물가 시대에 작은 사치로 꾸준히 소비되는 향수는 패션 뷰티 산업의 주요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향수의 또 다른 강점은 접근성이다. 수백만 원대 의류는 망설여지지만,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브랜드를 경험하기 용이한 것. 이 는 장기적인 패션 소비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패션 브랜드는 바로 이러한 부분에 주목한다. 향수가 하우스의 입문용 매개체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는 것이다. 최근 하우스들이 미니어처 플라콘 세트, 디스커버리 박스, 트래블 스프레이 등을 함께 선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향을 ‘선택’하는 과정 자체를 경험으로 설계하고, 소비자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다. 향수를 독립적인 카테고리로 확장하려는 전략인 셈.
향수 시장이 성장할수록 지속 가능성 역시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다. 리필가능한 보틀, 재활용 패키지, 원료 추출 방식 개선 같은 제조의 언어가 커뮤니케이션 전면으로 올라오는 까닭이다. 소비자는 향을 구매하면서 동시에 브랜드의 태도를 경험한다. 향수를 컬렉션으로 대할수록 이 태도는 단발 캠페인이 아니라 반복되는 제품 경험 속에서 검증된다. 이 지점에서 향수는 가치 소비 트렌드와 밀접하게 맞닿는다. 가격 대비 효용을 따지는 합리적 소비를 넘어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에 부합하는 브랜드를 선택하는 흐름이다.
향수를 컬렉션으로 운영하고, 리필이나 지속 가능한 패키지를 함께 제안하는 하우스의 전략은 단발성 메시지에서 나아가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는 메시지로 읽힌다. 또한 패션 브랜드는 제품 개발보다 운영 방식에 집중한다. 이에 대형 뷰티 기업과의 라이선스 계약으로 이뤄진 향수 비즈니스의 표준이 흔들리고 있다. 이전 하우스는 브랜드의 네임 밸류를 제공하고, 파트너는 조향 및 제조, 규제 대응과 글로벌 유통을 담당하는 구조였다. 이는 대규모 설비 투자 없이 로열티 수익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구체적인 향의 정체성과 리테일 경험까지 세밀하게 통제하기 어려웠다.
하우스는 브랜드의 미학을 향, 보틀, 공간, 경험까지 하나의 연결고리를 지닌 언어로 묶기 위해 장기 파트너십과 사업 재편을 통한 균형점을 다시금 모색하고 있다. 더불어 2026년 트렌드 담론에서 언급되는 필코노미(Feelconomy)가 가세한 가운에 향수 시장은 더욱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필코노미는 기능이나 가격보다 감정적 만족과 정서적 회복을 중시하는 소비 경향으로, 소모품인 향수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소비자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하우스의 미학을 런웨이의 순간에서 일상의 작은 루틴으로옮기는 변화. 패션 브랜드의 향수 사업 발전에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사진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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