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알에 심은 캐스퍼 보스만스의 다정한 연대

콩알 하나에 세계가 들어 있다. 캐스퍼 보스만스가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
BY 에디터 김초혜, 김초혜 | 2026.02.26
캐스퍼 보스만스
캐스퍼 보스만스(Kasper Bosmans)의 작업실은 세상이 기록 하지 못한 목소리와 방대한 자료가 쌓인 지적 아카이브다. 그는 집요하게 자료를 탐구하고 흩어진 이야기를 수집하지만, 이를 무겁게 선언하지 않는다. 지독한 사유의 끝에서 그가 건네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산뜻한 ‘콩알’의 형상이다. 지식의 무게를 덜어내고 경쾌한 선과 색으로 재탄생한 소외된 이야기들은 관객에게 질문을 남긴다. 정밀한 기록을 따뜻한 연대의 에너지로 치환하는 보스만스의 세계. 그는 이 세심한 복원의 과정을 ‘사랑’이라 부른다.
캐스퍼 보스만스의 작품
글래드스톤 서울의 블랙 파사드가 이번 전시의 거대한 캔버스가 됐다. 2년 전 갤러리를 처음 방문했을 때 검은색 파사드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독특한 건물이다. 그때부터 파사드에 뭔가를 그리고 싶었다. 콩을 전시한다는 게 초현실적이지 않나. 그런데 이걸 크게 만들어서 파사드와 벽에 적용하면 진지한 모티브가 된다. 벽화 작업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 벽화는 건물과의 강렬한 물리적 접촉이다. 특별한 노력이 공간을 변화시킨다. 허가받고 건물에 직접 뭔가 그리는 건 그 대상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다. 전시가 끝나면 모든 게 덮여 사라진다는 점도 좋다. 내 작업에서 하나의 에피소드 같은 거다. 건물에 각인됐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이지만 강렬한 순간이다.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 그룹전 때 내 그림에 디테일이 많다 보니 사람들이 오래 머물러 관람 흐름이 느려지더라. 그때부터 건물 안에서 디테일을 어디에 배치할 지와 사람들이 어디서 편안하게 볼 수 있을지를 더 신경 쓰게 됐다. 이번 전시에 유난히 ‘콩’이 변주돼 등장한다. 수많은 모티브 중 왜 하필 콩을 선택했나? 콩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안에 특별한 상징이 없기 때문이다. 내게 콩은 그냥 하나의 채소다. 콩에 대해 강한 의견을 가진 사람은 없지 않은가. 아직 국기에 콩을 그려 넣은 나라를 본 적이 없다.(웃음) 콩은 단순하지만 누구나 알아볼 수 있고, 석류 같은 오래된 상징들처럼 무겁지 않아 몰입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콩 그림은 부엌에 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건물 벽에 크게 그리면 그 자체로 높은 잠재력을 지닌다. 형태로서도 관능적이다.
갤러리 외벽의 블랙 파사드
갤러리 외벽의 블랙 파사드.
콩에 처음 주목하게 된 계기는? 브라질 작가 호세 레오닐송(José Leonilson) 덕분이다. 그는 HIV 합병증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최근 그의 작품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주로 HIV 진단 이후의 작업이 부각되지만, 나는 그 이전의 회화적이고 감정적인 언어로 사랑과 소통을 탐구하던 시기의 작품들에 더 끌렸다. 그중 한 그림에서 ‘콩’을 발견했고, 콩이 계속 탐구해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그림 속 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이 받은 영감들로 채워져 있다. 키스 해링의 작품도 엿볼 수 있다. 건축 비평가 에런 베츠키는 < Queer Space >에서 퀴어 공간의 구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사회와 환경에서 취한 다양한 요소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자 자화상을 만든다고. 나 역시 이 시스템 안에 있다.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핵심 서사는 바로 ‘콜라주된 정체성’이다. 나는 하나의 콩을 창으로 표현했다. 내가 그린 콩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창이다. 그중 하나는 키스 해링의 미완성에 가까운 후기 작품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나는 그의 작업은 물론 유산을 남기는 방식까지도 좋아한다. 해링은 자신이 만든 재단의 수익을 어려운 처지의 청년들과 HIV를 안고 태어난 아이들의 미술 교육에 쓰도록 했다. 그의 삶과 그가 남긴 방식 모두 내게 깊은 영감을 준다. 당신은 스스로를 ‘이야기의 연결 고리를 만드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그 연결의 끝에서 궁극적으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야기들 간의 대응 관계를 찾는 것이 작업의 핵심이다. 이번 작품의 서사들은 본성적으로 ‘퀴어적’이다. 사회에서 타자로 여겨지는 사람들,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만든 이야기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모아왔는데 일종의 인정에 대한 감각이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TV에서도 볼 수 없었고,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한다는 게 뭔지 스스로 발견하고 알아내야 했다. 그래서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힌트나 흔적을 찾을 때마다 그것을 아카이빙해왔다. 나는 코끼리 같은 뇌를 가졌다. 하하. 한 번 만난 이야기를 절대 잊지 않는다.
캐스퍼 보스만스의 작품
당신의 작업실 모습은 어떤가? 벨기에에 좋은 스튜디오가 있고 필요한 재료도 다 있다. 유화로 계속 그려보려고 했는데, 결국 집에서 밤에 작업하는 걸 선호하더라. 모든 패널을 동시에 한다. 덕분에 집이 엄청 지저분하지만 모든 그림과 함께 살면서 작업하는 게 좋다. 그리고 수를 놓듯이 작은 디테일을 만들어나간다. 마치 제인 오스틴이 자수를 놓듯이. 물감을 두껍게 쌓지 않고 얇게 바르는 이유가 있나? 흡수력이 좋은 바탕을 선호한다. 토끼 가죽 아교와 분필을 섞어 만드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패널이나 캔버스를 준비한다. 이번에 전시한 붉은 배경의 작품을 보면 얼룩덜룩한데, 오히려 그 점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인쇄한 듯 평평한 색이 아니라 여러 겹의 레이어가 있기 때문에 벨벳 같은 질감이 난다. 방대한 자료를 들여다보면서 만든 작품이 산뜻하게 다가오는 건 의도적인 선택일까? 나는 드라마틱한 사람이다. 베르디, 도니체티… 매일 이탈리아 오페라를 듣는다. 사랑과 그 불가능성에 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내 작품이 지나치게 노스탤지어적으로 보이진 않길 바란다. 모든 맥락을 알아야만 즐길 수 있는 작업이 되고 싶진 않다. 어쩌면 1년 뒤, 누군가가 일식집에서 콩을 집어 들다 블랙 파사드에 그려졌던 내 콩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모든 걸 즉시 소비할 필요는 없다. 파편만 즐겨도 충분하니까.
브론즈 작업의 매력은? 굉장히 데캉당한 작업이다. 재료값이 비싸고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찰나의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그 과정을 즐기는 편이다. 함께 작업하는 주조소와는 12년, 어쩌면 15년 가까운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운이 좋은 셈이다. 브론즈는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작업이고, 주조소 사람들은 늘 내 작업의 첫 번째 관객이 된다. 전시에 대해 가장 먼저 이야기를 나누는 존재이기도 하다. 예컨대 내가 큰 새를 작업하고 있으면 어깨를 툭 치며 “왜 새인가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까마귀에 얽힌 이야기 같은 걸 해야 하고, 나는 이 과정을 좋아한다. 다시 말하지만, 혼자 만들기만 하면 아름답지 않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 아름다워지기 시작한다. 당신에게 퀴어니스와 사랑은 중요한 주제다. 지난 몇 년간 대안 미술사를 위해 노력했다. 많은 퀴어 코딩을 드러내고 퀴어 작가들을 보여주는 거다. 하지만 퀴어 작가들만 봐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랑은 인류의 중요한 감정 중 하나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고, 전쟁까지 불사하게 하는 중요한 것이다. 사랑은 어떤 사회적 코드로부터도 독립적이어야 한다. 미래에는 아이들에게 누구를 사랑하는지 물어봤으면 좋겠다. 남자를 사랑하는지, 여자를 사랑하는지가 아니라. 사랑은 젠더 정체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돼야 하고, 사회적 구조로부터도 분리돼야 한다. 나한테는 퀴어니스 자체보다 사랑이 더 중요한 주제다. 그게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고, 공통의 기반을 찾는 곳이거든.
캐스퍼 보스만스의 작품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작가가 생각하는 사랑은 뭘까? 사랑은 함께 있는 사람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며 어제만큼 오늘도, 내일도 사랑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사랑은 언어이기도 하다. 아담이 낙원에 혼자 있었을 때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아 지루했겠지만, 이브가 등장하면서부터는 매일이 달라졌을 것이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오늘 해가 아름답게 지네요” 같은 말을 건넬 수 있게 됐으니까. 사랑은 그런 순간을 함께 긍정하고, 아름다움의 언어를 나누는 것이다. 사랑과 아름다움이 연결된다고 믿는가?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들은 매일 더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움은 퀄리티가 아니다. 끊임없이 진화하기에 사랑과 아주 가깝다. 아름다움은 상대적이며, 함께 공유하는 거다. 세상에 혼자 있고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다면, 왜 뭔가가 아름답다고 입을 떼어 말하겠는가? 학교 다닐 때 많은 선생님이 작품의 퀄리티에 대해 얘기했는데, 퀄리티라는 단어는 문제가 많다. 아무 이유 없이 사용되고, 미술계에서 특정 입장을 차별하는 데 쓰이거든. 이 단어를 일상에서 제거하면 삶에서 더 많은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캐스퍼 보스만스의 작품
하나의 꼬투리 안에 들어 있는 콩은 유대감으로도 읽힌다. 이번 전시 제목이 ‘Peas, Pod’인데, 이건 ‘2개의 콩알처럼’이라는 의미로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암시한다. 서로 이해하고, 함께 행복하고, 아주 가깝다는 뜻이다. 이게 전시의 핵심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들이 꼬투리 안에 들어선 콩처럼 느끼길 바라는 걸까? 멋진 생각이다. 작품은 실제로 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림에 뭐든 투사할 수 있을 테니까. 내 어린 시절 가장 중요한 기억은 박물관에 간 거였다. 지난 일요일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는데, 중세 왕관이나 말 굴레 같은 놀라운 것들을 실제로 봤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자유롭게 보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적합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도구로 내 그림을 즐겨주 길 바란다.
PEAS, POD
캐스퍼 보스만스의 한국 최초 개인전 《Peas, Pod》는 글래드스톤 서울에서 3월 14일까지 열린다.

사진

이우정

인터뷰
캐스퍼 보스만스
Kasper Bosmans
Peas Pod 전시
글래드스톤 서울
현대미술 전시
브론즈 조각
현대 회화 작가
해외 작가 전시
서울 갤러리 전시
2026 전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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