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묶는 방식 - J.KIM 디자이너 제니아 킴
갈래로 피어난 꽃잎 혹은 사랑. 꽉 잡아맨 보자기 매듭에서 출발한 문양. 디자이너 제니아 킴이 엮어낸 따스한 온기에 대해.
BY 에디터 양윤영 | 2026.03.121991년생,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자란 고려인. 자신을 낳아 기른 여성들의 손끝과 기억에서 영감을 받아 옷을 짓는 사람. 또 다른 여성을 낳아 키우면서 새로운 삶의 태도를 찾아가는 사람. 러시아어로 말하는 제니아 킴은 스스로를 ‘Koryo-Saram’이라고 칭한 답변을 보내왔다. 한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그 중간 지점에 형성된 정체성. 켜켜이 쌓인 문화적 유산을 아름답게 묶어내며 그는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하는 중이다. 타슈켄트의 시간은 서울보다 4시간 느리게 흐른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어떠한 시차도 없었다.

꽃을 모티브로 한 셔츠와 공예 액세서리. J.KIM은 패션 아이템을 넘어 장인 정신을 기반으로 한 화병 등 다양한 오브제도 선보이고 있다.
반갑다. <싱글즈> 독자들을 위해 자기소개 부탁한다.
브랜드 J.KIM의 디자이너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는 제니아 킴이라고 한다. 1991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고, 러시아에서 자란 ‘고려 사람’이다. 현재 J.KIM 팀은 타슈켄트를 거점으로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유산과 고려인의 역사를 동시대의 의복과 오브제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제니아 킴은 어떤 사람인가?
나 자신과 브랜드를 분리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브랜드는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해왔고, 단순한 일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요즘 어떤 마음으로 일하고 있나?
최근 엄마가 되면서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다. 미래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우리가 남기고 가는 것 혹은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들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됐다.
스스로를 ‘고려 사람’이라고 칭한 게 인상 깊었다. 그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느낄 때는 언제인가?
가족과 함께 있을 때다. 식사 시간, 주방에서는 러시아 음악과 러시아어로 하는 대화 소리가 들리지만 식탁에는 늘 한식이 오른다. 그 중간 지점에 고려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을 방문할 때도 다른 의미로 정체성을 또렷이 인식하곤 하는데, 한국은 웃어른에 대한 존중이 몸짓 하나하나에 배어 있다고 느낀다. 난 한국말을 하지 못하고, 한국에서는 외국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나. 이럴 때는 내 정체성이 다른 곳에서 형성됐다는 사실도 은연중에 느끼곤 한다.
브랜드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쩌면 필연이었던 것 같다. 하나의 굵직한 사건이 있었다기보다 늘 내 안에 잠재된 것이랄까. 내 가족은 모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었고, 나 또한 아주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했다. 누군가 말하길 만으로 두 살 때 이미 나는 천을 자르며 드레스를 만들고 있었다고 하더라. 하하. 특히 딸을 낳은 후 더욱 여실히 실감하고 있다. 아이를 낳아 직접 키워보니 얼마나 이른 시기에 취향과 성격이 형성되는지 새삼 깨닫고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 성장했다고 느낀다.
특별한 공간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오래된 집이다. 처음에는 검찰관의 집이었고 이 후 대사관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J.KIM이 사용하고 있다. 함께 밥을 먹는 부엌과 팀원이 머물 수 있는 방이 있고, 아이들도 오가는 공간이다. 내부에는 커다란 홀이 있는데, 이곳에 들어오기 1년 전에 ‘빛과 공기가 가득한 밝은 공간’이 오피스면 좋겠다고 상상한 적이 있다. 그리고 처음 이 공간을 들어설 때 바로 느꼈다. 또 인테리어에는 예전에 살던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있어 더욱 특별하고. 이곳에서 팀원들과 함께하는 협업은 단순한 생산이 아닌, 아름다움과 생활감이 공존하는 곳에서 살아가는 경험에 가깝다.
수작업 방식으로 의류를 생산하면서 글로벌 시장에 꾸준히 납품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사실 정말 어렵다. 하하. 복잡한 패턴과 디테일을 손수 만드는 일은 품이 많이 든다. 솔직히 말해 인풋에 비해 수입적인 아웃풋이 크지 않을 때가 잦다.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옷은 어떠한 감각과 흔적을 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면의 진심 어린 울림을 동기 삼아 J.KIM의 옷을 계속 만들고 있다.
빈티지 소련 직물과 한국의 자카드 실크를 대표 소재로 활용하는데, 눈여겨보고 있는 다른 소재가 있다면?
2026 F/W 컬렉션에서는 바자르 시장에서 구한 저렴한 벨벳 원단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실생활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소재기 때문이다. 이번 컬렉션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피어나는 풍요로운 감정에 대해 다뤄서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J.KIM의 옷을 구성하는 다른 시그너처 요소에 대해서도 설명해달라.
가장 큰 건 공예 디테일이다. 시즌마다 형태만 달리하면서 쭉 이어오고 있는 요소인데, 패치워크, 자수는 물론이거니와 이번 시즌은 뜨개질과 촉각적인 작업이 중심이 된다. 모든 것이 빠른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은 손때 묻은 물건들을 그리워한다고 느낀다. 공예는 그 온기를 보존하는 방식이 되는 셈이다.
J.KIM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매듭, 꽃잎, 컷아웃 같은 디테일은 어떤 기억이나 감정에서 시작됐나?
어릴 적 친척들이 이모의 액세서리를 보자기에 싸는 장면이 담긴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여기에는 다섯 살인 나도 등장하고! 이모들이 매듭을 지을 때 보이는 문양이 내 시그너처가 됐다. 또 타슈켄트 바자르 시장에서 천 조각들의 더미를 봤을 때 설명할 길이 없이 사랑에 빠졌던 경험도 생각난다. 시장 사람들 역시 스카프나 직물로 옷을 싸기 때문에 이 또한 디자인 요소의 영감이 됐다.
현재까지의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결과물이 궁금하다.
타슈켄트 모더니즘을 다룬 컬렉션이 떠오른다. 러시아에서 오래 지낸 뒤 타슈켄트로 돌아와 새로운 시각으로 도시를 바라보던 시기였다. 소비에트 건축의 차양에서 셔츠의 형태를 본뜨고, 모자이크 양식을 스커트와 재킷의 디테일로 풀어냈다. 도시 자체를 하나의 컬렉션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뜻깊은 작업이었다.

디자이너 제니아 킴이 그의 뮤즈 A‘ nya’와 함께 촬영한 기념 사진.
2025 S/S 컬렉션에서는 할머니의 손길에 대한 오마주, 2025 F/W 컬렉션은 모성을 주제로 삼았다. 한 시즌을 시작할 때 보통 ‘첫 단추’가 되는 건 무엇인가?
시작점은 대개 내가 현재 살아가는 순간이다. 할머니에 대한 컬렉션은 내가 임신했을 때 탄생했다. 왜, 둥지를 틀고 싶어지는 어떤 상태가 있지 않나. 그때 할머니가 떠올랐다. 자수를 놓고 집 안을 정성과 돌봄으로 가득 채운, 손으로 안락함을 만드는 사람인 그가 말이다. 또 출산을 하고 나서는 모성이 다음 컬렉션이 됐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다음 컬렉션에 대한 스포일러도 가능할까?
지금은 시장에 대해 생각한다. 이곳에서 즐겁고 행복한 마음을 품고 사는 여성들에서 영감을 받았다. 평범한 삶이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나 색채에 대한 갈망, 감정의 풍요로움을 향한 열망이 존재한다. 벨벳, 라인스톤, 금빛 색채와 겹겹이 쌓인 레이어들까지. 이는 특별한 날만을 위해 차려입는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면의 존엄, 그리고 삶의 긍정적인 빛을 들이고자 하는 의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믿는다. 예전에 한 재단사의 결혼식에서 잊지 못할 장면을 마주한 적이 있다. 몇 번이나 전기가 나갔는데도, 사람들이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이처럼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기쁨을 이번 컬렉션의 주요 테마로 삼았다.
제니아 킴이 바라본 여성성에 대한 이미지도 궁금하다.
내게 여성성은 ‘풍요로움’이다. 한 여성의 주변에서 따스한 온기가 번진다고 믿는다. 어떠한 의무감이나 역할, 노동으로서의 돌봄이 아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배려 말이다. 어떤 여성들 곁에서는 이유 없이 잠시 쉬고 싶어진다. 겉모습과 지위에 국한되지 않고 그 자체로 따뜻함을 지닌 사람들. 이것이 진짜 여성적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삶과 아름다움, 평온함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힘 같은 건 또 어떻고!
2025 F/W 컬렉션에서 선보인 조바위 헤드피스도 인상적이었다.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디자인에 어떻게 드러나나?
형태와 그 안에 채울 내용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절제된 실루엣은 한국적인 감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건 중앙아시아, 고려인, 소비에트의 흔적이다. 고려인에게는 명확한 전통 의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디자인 언어로 구축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당근 샐러드처럼 말이다. 우즈베키스탄 재료에 한국식 조리법이 더해져 전혀 다른 무언가가 탄생하지 않았나. 한국적인 실루엣, 우즈베키스탄의 원단, 때로는 소비에트 시절의 소재까지 그 자체로 ‘나’인 것들을 전통과 현재 사이에서 조합하려고 한다.
작업을 위한 레퍼런스는 주로 어디에서 수집하나?
레퍼런스 수집 이전에 가장 근원적인 지점에서 작업을 출발하려고 노력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찾고 있는 것, 말하고자 하는 건 SNS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즈베키스탄의 평범한 일상, 도시가 가진 질감, 여성들의 옷차림과 거리의 분위기 같은 거다. 이건 휴대폰이 아닌 정말 바깥으로 나가 직접 보고, 관찰하면서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머릿속으로 영감을 어느 정도 떠올린 후에 이를 더 뾰족하게 만들기 위한 레퍼런스를 모은다. 이때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책, 구글 이미지 등을 살펴보는 편이다.
요즘 들어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면?
비즈니스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브랜드가 거의 순수 예술, 창작에 가까웠다. 나 또한 스스로 수익의 관점에서 옷을 만들지도 않았고, 별도의 시스템을 구축하지도 않았다. 그게 우선순위가 아니어서 그랬다. 하지만 딸이 태어난 후에 책임에 대한 무게가 달라졌다고 느낀다. 브랜드를 지속 가능하게 운영하고 싶다. 그래서 요즘 공부한다.하하. 자동화 시스템을 만들고 명확한 체계를 갖추는 중이다. 올해 목표는 보다 더 안정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J.KIM의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에 대해 들려달라.
우선은 시스템을 안정화하고 프로세스를 정돈해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것. 그다음은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 브랜드를 확장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J.KIM이 단순한 의류 브랜드가 아닌 하나의 살아 있는 세계로 남기를 바란다.
이제 봄이다. 무언가를 꽃피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간단명료하게 말하고 싶다. 자제력과 열망은 당신을 멀리 데려다줄 거다. 난 시장도,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브랜드를 만들었다. 하지만 매일 한 걸음씩 나아가고, 배우고,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움직이더라. 끈기와 우직함이 있다면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무언가를 꽃피운다는 것은 주변의 조건보다는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움직임이 시작될 때 일어나니까.
사진
@j.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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