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F/W, 룰을 다시 쓰는 사람들
계승 혹은 전복. 베일을 벗은 2026 F/W 컬렉션, 9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내놓은 명징한 해답.
BY 에디터 양윤영 | 2026.03.27
새로운 수장을 맞이한 명망 높은 하우스들이 게임의 룰을 바꾸고 있다. 관전 포인트는 전임자의 유산을 거름 삼아 자신만의 색을 더했느냐, 혹은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느냐 하는 것. 이미 한 차례 데뷔 쇼를 치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은 이번 2026 F/W 컬렉션에서 자신들의 방향성을 더욱 확고히 했다. 계승과 전복 사이, 조타를 잡고 물길을 가로지르기로 결심한 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명징한 해답을 내놓았다.
첫 번째는 뎀나. 메종 마르지엘라와 루이 비통에서 경력을 쌓고 베트멍을 론칭하며, 발렌시아가의 수장으로서 세상을 열광하게 만든 장본인. ‘뎀나’라는 이름 두 글자만으로 그가 지나온 명확하고도 분명한 궤적이 그려진다. 그가 구찌로 이적했을 때 톰 포드와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잇는 그만의 구찌를 만들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으나, 한편으론 하우스의 유산보다는 독자적인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절묘한 중간 지점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하우스의 뿌리인 ‘이탤리언 애티튜드’에 초점을 맞춰 밀라노를 선택, 쇼가 아닌 영화로 구찌의 귀환을 알렸다. 쇼 전날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편지 한 장은 그의 진심을 대변한다. 줄곧 ‘구찌다움’을 이해하는 데 몰입해왔으며, 이탈리아 문화와 정신을 바탕으로 헤리티지와 패션의 공존을 추구하겠다는 것. 구찌를 향한 뎀나의 연서는 런웨이에서도 이어졌다. 신체 곡선을 유려하게 따라가는 실루엣, 톰 포드 시절을 연상시키는 슬릭한 슈트와 로라이즈 스키니 팬츠는 구찌의 황금기를 소환했다. 힙색으로 스트리트 무드를 더하고 모델들의 개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 대목은 지극히 뎀나답다. 특히 피날레를 장식한 케이트 모스, 몸에 밀착된 백리스 드레스와 컷아웃된 G 스트링은 뎀나가 나아가고자 하는 구찌의 미래를 함축적으로 보여줬다.
디올의 조너선 앤더슨 역시 유사한 런웨이 화법을 구사한다. 튀일리 정원, 해사하게 펼쳐진 수련 연못 위로 그가 빚어낸 완벽한 ‘디올 우먼’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그는 하우스의 상징인바 재킷의 길이를 짧게 조정하고, 풍성한 시폰 튜튜 스커트를 매치해 물 위로 피어오른 연꽃을 형상화했다. 무슈 디올이 사랑했던 꽃송이들이 조너선 앤더슨 특유의 뒤틀린 실루엣과 과장된 볼륨을 통해 현대적으로 만개한 듯 보였다. 하우스의 우아한 헤리티지를 해체하고 새로운 맥락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에 데님과 슈트 소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함으로써 그가 줄곧 강조해온 실용적인 럭셔리의 면모도 놓치지 않았다. 조너선이 크리스찬 디올 이후 하우스 전 부문을 총괄하는 최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이유는 이번 쇼를 통해 재입증됐다.
샤넬과 발렌시아가는 헤리티지에 더욱 집중하는 방향을 택했다. 마티유 블라지는 ‘애벌레와 나비’라는 가브리엘 샤넬의 격언을 빌려 현시점의 샤넬과 마주했다. 낮에는 애벌레처럼 편안하게, 밤에는 나비처럼 화려하게. 트위드는 오버사이즈 워크웨어와 블루종으로 변주돼 간결한 실루엣을 입고, 단추 대신 자리한 지퍼와 실리콘 소재 등 과감한 디테일은 소재의 밀도를 전면에 드러냈다. 1920년대 플래퍼 스타일과 재즈 시대에 대한 경외심을 담은 메탈 메시 슈트는 캐주얼이 환상적인 나비로 탈바꿈한 순간 같았다.
발렌시아가의 피에르 파올로 피치올리는 데뷔 쇼에서부터 전임자들에 대한 오마주로 정면 승부를 걸었다. 그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구조적인 실루엣과 뎀나가 구축한 서브컬처 무드를 결합하며, 드라마 <유포리아> 제작자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유입층까지 만족시키는 영리한 표현 방식을 보여줬다.
로에베와 보테가 베네타는 전임자가 가꿔놓은 화단위에서 기분 좋은 합의점을 찾았다. 잭 매컬로와 라자로 에르난데스 듀오는 조너선 앤더슨의 공예적 언어에 도회적인 역동성을 결합했다. 과감한 컬러 대비와 가죽 패치워크, 비정형적인니트웨어는 로에베의 자산을 가장 트렌디한 문법으로 풀어낸 결과물로 비친다. 보테가 베네타의 루이스 트로터 역시 인트레치아토 기술에 침잠하며 로고 없이도 강렬한 조용한 럭셔리의 정점을 찍었다.
질 샌더의 시몬 벨로티와 드리스 반 노튼의 줄리안 클라우스너 또한 하우스 고유의 미학을 강화하며 계승과 혁신 사이의 우아한 균형을 증명해냈다. 반면 마이클 라이더의 셀린느는 과거의 모든 것을 뒤집어 엎었다. 에디 슬리먼의 스키니 실루엣과 록 시크 무드를 지우고, 그 자리에 1970년대 프렌치 부르주아 스타일을 복원한 것. 애초에 프랑스 지성의 상징인 인스티튜트 드 프랑스를 쇼 베뉴로 택한 것부터가 보헤미안으로의 이동을 예고한 복선이었다. 다이앤 키턴을 연상시키는 정제된 재킷과 실크 스카프는 에디의 셀린느와는 완전히 다른, 리얼 웨어 중심의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며 이번 시즌 드라마틱한 반전을 선사했다.
체크메이트! 룰 체인저들의 체스 게임 은 이미 시작됐다. 전례 없는 대이동 이후 다시 재편될 하우스의 권력 지형, 우리는 지금 그 흥미로운 서막 앞에 서 있다
사진
박종원, ⓒ launchmetrics/spotl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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