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디자인 위크 2026 리포트 1
패션 브랜드가 공간으로 말하는 방식. 회전목마와 태피스트리, 플리츠 가구까지. 브랜드의 세계관을 공간으로 확장한 밀라노 디자인 위크 2026 리포트.
BY 에디터 김초혜 | 2026.05.27매년 4월, 밀라노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디자인 테마파크가 된다.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모이고, 브랜드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공간’으로 번역한다. 패션 브랜드들은 15분의 화려한 런웨이 대신 전시 공간과 경험을 만들고, 모델 대신 관람객을 움직이게 한다. 장담컨대 그 어떤 테마파크보다 더 재미있다. 2026년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전시 기획자이자 아티스트, 그리고 관람객의 시선으로 바라본 다섯 개의 패션 브랜드 공간.
ARKET × LAILA GOHAR
일상의 모든 순간을 예술적으로, 아르켓 × 라일라 고하
전시 기획자로서 회전목마를 만드는 것은 늘 나에게 하나의 로망이었다. 샤넬(Chanel)의 2008 S/S 쇼에서 2층 회전목마를 본 이후, 언젠가 꼭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에르메스, 시몬 로샤, 꼼데가르송 등 패션 브랜드들의 사랑을 받는 푸드 아티스트 라일라 고하(Laila Gohar)가 노르딕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아르켓(Arket)과 회전목마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콘텐츠는 가만히 서 있고 관람객들이 움직여야 하는 일반 전시와 달리 관람객이 선 채로 움직이는 전시를 관람하는 것은 분명 큰 재미를 선사한다. 게다가 그 움직이는 전시대 위에 내가 올라탈 수 있다면? 그만큼 확실한 참여형 전시 방법이 있을까. 프랑크 소시지를 활용한 케이크, 거대한 슬래브 브레드로 만든 소파, 빨래 건조대에 널린 연어 그라브락스 피스들. 라일라 고하의 푸드 작업은 늘 현실에서 한 발짝 비켜나 있다.
이런 라일라가 처음으로 자신의 미감을 레디 투 웨어(기성복)에 녹여 아르켓과 컬래버레이션을 했고, 그것을 밀라노 한복판에 있는 공원 한가운데 회전목마로 선보였다. 실로 라일라스러운, 동화스럽고 초현실적인 발상이다. 평소 특별한 순간을 위해 옷을 아껴두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끼는 옷을 입고 요리를 하거나 손님을 맞는다는 것만 보아도 모든 순간을 예술적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그녀의 태도가 느껴진다. 늘 정제된 미니멀리즘을 보여주던 아르켓의 라일라 고하와의 컬래버레이션은 작은 일탈처럼 보인다. “우리도 이만큼 사랑스러울 수 있지롱!” 하고 애교 섞인 몸짓으로 외치는 듯하다. 일반적인 런웨이에서 모델들이 옷을 입고 레디 투 웨어를 선보이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이었다. 심지어 그 인스톨레이션 전시에 옷이 한 피스도 없는데도 말이다. 대형 무화과에 사람이 타 있는 이미지만 보고도 사람들은 무엇인지 궁금해했고, 어떤 컬래버레이션 피스들이 나왔는지 검색해봤다.
ISSEY MIYAKE
뻔해도 해야 할 건 해야지, 이세이 미야케
뻔한데 이상하게 반박이 안 되는 작업들이 있다. 이유가 너무 분명해서다.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의 이번 전시가 그랬다. 종이에 브랜드의 시그너처인 플리츠 공정을 적용해 가구를 만든다. 이건 너무 그냥 이세이 미야케잖아. 그래서 더 흥미롭다. 너무 ‘그들답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까지 왜 없었는지가 더 이상해지는 작업. 플리츠 기법을 처음 선보인 이후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변주를 이어왔지만, 그 확장은 늘 섬유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처음으로 그 공정이 완전히 다른 스케일과 용도로 이동했다.
전시는 플리츠 제작 과정에서 사용하고 버리던 종이에서 시작된다. 원단 사이에 끼워 형태를 만드는 이 얇은 종이는 압축된 ‘로그(Log, 통나무)’ 형태로 남는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토시 곤도(Satoshi Kondo)는 이 덩어리를 나무처럼 다루기 시작한다. 자르고, 깎고, 펼치고, 다시 고정한다. 그 결과 스툴과 체어, 벤치와 테이블로 이어지는 가구들이 만들어진다. 이 오브제들의 핵심은 단면이다. 종이가 눌리고 쌓이는 과정에서 생긴 결, 그리고 플리츠 공정 중 원단의 색이 미세하게 전이되며 남긴 흔적이 층처럼 드러난다. 대리석 같기도, 나무 같기도 한 이 질감은 디자인된 것이 아니라 공정이 남긴 기록에 가깝다. ‘왜 이걸 진작 안 했지?’ 전시장을 찾은 많은 디자이너가 비슷한 생각을 한다. 실제로 곤도 역시 플리츠 기법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할 가능성을 오래 고민해왔다고 말한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새롭기보다는 필연에 가깝다. 이세이 미야케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했어야 하는 작업. 그리고 그 ‘언젠가’가 이제서야 도착했을 뿐이다.
GUCCI
진정한 럭셔리는 시간, 구찌

구찌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웹 스트라이프.
레거시가 지나간 과거의 유산을 말하는 것이라면, 헤리티지는 과거-현재-미래 전반에 걸쳐 브랜드가 가지는 의미와 비전을 함축한 것이다. 뎀나는 이 전시를 하나의 헤리티지 서사로 구성했다. 구찌(Gucci)의 시대별 전환점을 각각 하나의 장면으로 눌러 담아 태피스트리로 만든 것이다. 1800년대 말, 구초 구치가 런던 사보이 호텔에서 포터로 일하며 영감을 얻었던 순간부터 ‘재키 백’이 등장한 순간, 찬란했던 톰 포드의 시대, 그리고 뎀나의 합류로 새로운 챕터를 앞두고 있는 현재까지. 아카이브 피스를 단순히 나열하는 대신 특정 순간과 장면을 압축하고, 이를 직조해 작품으로 만들었다.
전시 구성은 브랜드 자체를 하나의 문화적 유산으로 다루는 방식에 가까웠다. 16세기 역사적 건축물인 산 심플리차노(San Simpliciano)의 회랑을 따라 천천히 태피스트리 작품을 감상하게 하는 박물관적 연출, 공간 전체에 크게 울려 퍼지던 막스 리히터의 음악, 그리고 회랑 정원에 마치 오래전 심어놓은 것 같은 튤립들까지. 온갖 요소가 지금까지의 구찌의 모든 시간을 찬양하는 이 이벤트를 에워싸고 있었다. 역시나 최고의 럭셔리는 시간이다. 엄청난 시간과 수공을 요하는 태피스트리라는 매체와 구찌가 쌓아온 105년의 서사는 ‘시간’이라는 럭셔리의 감각과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이번 구찌 전시에서도 실제 제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시장을 나서는 많은 사람은 평소 갖고 싶었던 구찌의 제품들을 다시 찾아보느라 바빴다. “그 가방 얼마였더라?”
writer 루비 10년 차 전시 기획자이자 아트디렉터. 평일에는 머리를 쓰는 회사원으로, 주말에는 손을 쓰는 아티스트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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