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디자인 위크 2026 리포트 2

패션 브랜드가 공간으로 말하는 방식. 실험과 연구, 제조와 아카이빙까지. 밀라노 디자인 위크 2026에서 만난 브랜드 경험의 새로운 방식.
BY 에디터 김초혜 | 2026.05.28
매년 4월, 밀라노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디자인 테마파크가 된다.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모이고, 브랜드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공간’으로 번역한다. 패션 브랜드들은 15분의 화려한 런웨이 대신 전시 공간과 경험을 만들고, 모델 대신 관람객을 움직이게 한다. 장담컨대 그 어떤 테마파크보다 더 재미있다. 2026년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전시 기획자이자 아티스트, 그리고 관람객의 시선으로 바라본 패션 브랜드 공간.
NIKE
브랜드 실험실의 모범 답안, 나이키
NIKE
각양각색 브랜드가 ‘랩(Lab)’이라는 단어를 포장지 쓰듯 사용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면 실험 정신이라 할 만한 걸 쉬이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내게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나이키(Nike)가 선보인 에어 랩(Air Lab)은 ‘이게 실험이었지’ 싶었다. 베뉴는 밀라노 중앙역 인근의 철도 인프라를 재생해 만든 전시 플랫폼, 드롭시티(Dropcity). 터널이라는 물리적 구조는 이 전시에 거의 완벽한 내러티브 장치로 작동한다. 터널 하나 하나를 지날 때마다 관람객의 경험 동선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 다섯 개의 터널을 따라 관람객은 공기의 물성, 역사, 기술, 상상, 그리고 감각적 경험으로 점진적으로 진입한다. 첫 번째 터널에 들어서면 NASA의 연구실을 연상시키는 공간이 펼쳐진다. 공기를 활용한 실험과 워크숍이 한창이었고, 실제 실험실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환경에서 공기의 다양한 상태와 움직임을 탐구할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디자인 위크가 끝난 뒤에도 학생과 디자이너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이 장비들을 기증한다는 사실. 뒤이어 만난 두 번째 공간은 수장고를 연상케 했다.
나이키의 에어 기술을 적용한 100여 개의 프로토타입.
나이키의 에어 기술을 적용한 100여 개의 프로토타입.
이곳에는 지난 50년간 축적한 나이키의 에어 기술을 정교하게 정리해놓았다. 관람객이 직접 서랍을 열며 나이키의 에어 시리즈를 발견하는 참여형 전시로 구성한 것. 전시장을 두리번거리다 눈에 들어온 서랍을 열었다. 그 순간, 어릴 적 신었던 나이키 에어 시리즈에 대한 개인의 추억이 브랜드의 기술사와 자연스레 엮이는 기분이 들었다. 네 번째 터널은 그간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100여 개의 프로토타입이 긴 테이블에 늘어져 관람객을 맞이했다. 완성품이 아닌 수많은 선택과 실패, 실험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미완성작부터 미래를 향한 현재 진행형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완성’ 대신 ‘과정’ 그 자체가 강력한 결과물이라 제시하며 진정한 ‘실험’ 의 의미를 견고히 다지는 대목이었다. 전시의 마침표는 거대한 에어 밑창 형태 구조물. 낮은 조도, 에어 스모그를 가르는 레이저, DJ가 섬세히 고른 몽환적인 사운드가 어우러진 전시장은 흡사 클럽 혹은 명상 센터 같았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감각에 집중하며 전시의 마지막을 온 감각을 활용한 경험으로 기억하게 됐다. 나이키 에어 랩은 반짝이는 결과물보다는 이면의 노력과 시간을 펼치고 이를 관람객이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다듬었다. 그리고 보여주었다. ‘Just Do It’이라는 그들의 가훈처럼.
C.P. COMPANY × ALESSI
제조업의 미학, C.P. 컴퍼니 × 알레시
이 전시는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된다. 닫힌 금속 몰드가 열리고 제품이 찍혀 나오는 바로 그 순간. 인더스트리얼 헤리티지와 제조업의 미학을 공유하는 알레시와 C.P. 컴퍼니(C.P. Company)가 이번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멋진 컬래버레이션을 펼쳤다. 1971년 디자이너 마시모 오스티(Massimo Osti)가 설립한 C.P. 컴퍼니는 ‘가먼트 다잉(완성된 옷을 염색하는 방식)’과 기능성 소재 실험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스포츠/워크웨어 브랜드다. 군복, 작업복에서 출발한 실용적 디자인이 특징이다. C.P. 컴퍼니는 이번 컬래버레이션에서 1980년대 알레시의 공장 유니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세 가지 컬러의 워크 셔츠를 선보였다. 특히 딥 라벤더 컬러가 인상적인데, 이는 과거 알레시 공장에서 모카포트를 개발할 때 사용했던 패브릭 컬러에서 가져온 것이다. 알레시는 이번에 리하르트 자퍼의 9090 에스프레소 모카포트, 장 누벨의 컵과 소서, 엔초 마리의 트레이를 C.P. 컴퍼니의 다잉 기법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피니시로 재해석했다.
1980년대 알레시의 공장 유니폼을 모티브로 한 워크 셔츠.
시간이 지날수록 에이징되며 더 새로워지는 소재, 각각의 피스가 점점 진화하며 개성을 갖게 된다는 설명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집집마다 손때 묻은 모카 포트로 모닝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는 리추얼을 뼛속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는 감옥에서도 모카포트가 필수품에 포함된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이 나라에서 커피가 기본 인권을 위한 요소로 얼마나 탄탄히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있다. 밀라노 C.P. 컴퍼니의 헤드쿼터에서 열린 전시는 모카포트를 직접 조립하는 라이브 퍼포먼스와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려주는 대형 커피 스테이션을 포함해 공간 구성을 했다. 전시관 중앙에 설치한 키네틱 인스톨레이션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두 브랜드의 아카이브와 이번 컬래버레이션에 대한 리서치 및 과정을 보여주고, 왼쪽에는 그 결과 완성된 피스들을 전시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역시 디자인 리서치와 아카이빙 부분이었는데, 실제로 리하르트 자퍼의 모카포트를 위해 제작한 목업들과 이번 컬래버레이션 셔츠를 만들기 위한 메모와 옷핀이 가득 찔러져 있는 프로토타입도 볼 수 있었다. 중앙의 키네틱 인스톨레이션은 이번 협업 제품인 워크 셔츠와 알레시의 커피 제품들을 ‘찍어내는’ 거대한 금속 몰드가 열리고 닫히는 구조였다. 매우 단순한 방식이지만, 두 브랜드가 공유하는 ‘제조업의 미학’이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압축해 강한 인상을남겼다. 이번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가장 많이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전시였다. 커피와 노동, 모카포트와 워크 셔츠. 우리 일상에 가장 밀접한 두 가지를 만들어온 유서 깊은 두 제조업 브랜드의 밀도 높은 협업이었다. 그 워크 셔츠는 사 왔어야 했다.
런웨이가 15분의 짧은 일탈을 제공해 관람객들에게 전율을 선사한다면, 디자인 위크는 건설적인 토론을 이끌어낸다. 관람객들은 자신이 받은 감동만큼, 이 열띤 토론에 참여한 만큼, 브랜드가 던진 주제가 자신의 머릿속을 오래 지배할수록 그 브랜드를 더 사랑하게 된다. 나에게는 그 어떤 테마파크도 이토록 기꺼이 최고 출력으로 참여 하는 희열을 주지 못했다. 내가 밀란 디자인 위크를 매년 기다리는 이유다.
writer 루비 10년 차 전시 기획자이자 아트디렉터. 평일에는 머리를 쓰는 회사원으로, 주말에는 손을 쓰는 아티스트로 살고 있다.

사진

RUBY, Arket × Laila Gohar

어시스턴트

심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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