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이 입으면 뜬다! K-POP 패션 헌터스

K-팝 아이돌은 명품 브랜드의 공식 앰배서더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아시아 디자이너들의 홍보 모델이다. 지금 이들이 아시아 패션 시장을 일으키고 있다.
BY 에디터 송보란 | 2026.06.05
오늘날 아이돌과 패션의 관계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2000년대 후반 레이디 가가의 데뷔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레이디 가가를 필두로 리애나, 니키 미나즈 등 당대 주요 여자 뮤지션들은 익숙하고 평범한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 드라마틱하고 키치하거나, 전사 같은 극단적인 코스튬 스타일을 원했다. 하지만 팝계의 왕족(Pop Royalty)이라 불리는 이들조차도 예외 없이 유명 디자이너의 런웨이 의상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거부했어요. 의상을 빌려주겠다는 이가 아무도 없었죠.” 당시 레이디 가가의 패션 디렉터였던 니콜라 포르미케티(현재 뷰티 브랜드 맥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데이즈드(Dazed)> <어나더 매거진(Another Magazine)> 등 패션 매거진 의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화보 촬영용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디자이너 의상을 빌리곤 했다. 팝 스타들이 하이패션계 특유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견뎌내며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색다른 의상을 구하는 방법은 신인 디자이너를 물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포르미케티는 그들에게 빌리거나 협업한 레이디 가가의 모든 의상을 SNS에 포스팅해 디자이너와 브랜드를 태깅했다. 데이비드 코마, 브랜던 맥스웰, 매슈 윌리엄스 등이 레이디 가가(그리고 그녀의 의상 팀 하우스 오브 가가) 덕에 신인 때부터 주목받은 대표적 디자이너다. 최근 급부상한 메티에르 페칼도 정식으로 컬렉션을 론칭하기 전, 몇 벌 안 되는 의상을 레이디 가가가 입으면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팝 스타와 패션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됐으며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유명 디자이너 의상을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더라도 이들에겐 무대마다 늘 새로운 의상이 필요하다. 때문에 신인 디자이너 발굴은 팝 스타의 스타일리스트들에게 가장 크고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여겨진다.
K-팝 아이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장 쉬운 방법은 국내 신인 디자이너에게 의상 제작을 의뢰하는 것이고, 좀 더 욕심을 낸다면 해외 팝 뮤지션들처럼 미주와 유럽 신인 디자이너들에게 의상을 받기도 한다. 요즘 선호하는 방식은 그 중 간점인 아시아 디자이너와의 협업. 한때 루이 저우, 슈슈 통, 수잔 팡, 마크 공 등 중국 디자이너 의상을 입은 걸그룹 멤버의 사진이 SNS 피드를 휩쓸면서 ‘영 차이니스 디자이너’ 집단이 패션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 K-팝 아이돌 사이에서 각광받는 무리는 베트남 디자이너다. 이 물길을 연 브랜드는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팬시 클럽(Fanci Club)이다. 빈티지 의류를 업사이클링해 판매하던 디자이너 두이 트란(Duy Tran)이 2018년에 론칭한 브랜드로, 2020년 블랙핑크가 ‘러브식 걸즈’ 뮤직비디오와 무대에 입고 등장한 이후 두아 리파, 올리비아 로드리고, 벨라 하디드, 도자 캣등 전 세계 셀러브리티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앙증맞은 리본과 코르셋, Y2K풍 의 사랑스럽고도 섹시한 디자인, 나일론과 스판덱스, 메시 등 신축성 있는 소재를 사용한 짧고 타이트한 실루엣은 요술봉을 휘두르는 마법 소녀를 떠오르게 한다. 팬시 클럽은 “제 옷을 입었을 때 여성스러우면서도 자신감 있는 기분이 들길 바란다”는 디자이너의 바람 그대로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베트남 출신 스타일리스트 베벌리 응우옌(Beverly Nguyen)의 설명은 보다 구체적이다. “섹시한 공주 캐릭터가 밤에 놀러 나온 느낌이죠. 몇 년째 계속돼온 빈티지 트렌드와도 잘 어울립니다.”
엘소울(LSoul)은 K-팝 걸그룹이 관심을 보이기 전부터 태국 젠지들 사이에서 인기 높은 브랜드였다. 2024년에 아이유, 트와이스, 베이비몬스터를 시작으로 걸그룹의 단골 무대 의상이 되면서 가속도가 붙었고, 같은 해 제니가 SNS에 올린 영상 속 데님 러플 미니스커트가 대박이 나면서 베트남에서 제일 핫한 브랜드로 등극했다. 코르셋과 파스텔컬러, 러플이 곧 정체성인 디자인은 걸그룹 무대 의상 그 자체. 디자이너 응우옌 쫑 럼(Nguyễn Trọng Lâm)은 엘소울을 FASHION 이렇게 정의한다.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 빅토리안 클래식을 가미한 네오 로맨틱 스타일입니다.” 좀 더 전투적이고 게임 캐릭터 같은 콘셉트로 두각을 나타내는 브랜드는 라 륀느(La Lune)와 펭 시스템(Feng System)이다. 라 륀느의 디자이너 꽉 닥 탕 (Quách Đắc Thắng)은 공상과학,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에서 영감을 받아 뾰족한 스파이크나 플라스틱 뼈대 등을 활용해 갑옷 같은 의상을 구현한다. 2022년 에스파의 가요 대전 공연 의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블랙핑크의 로스앤젤레스 콘서트에서 리사가 입은 기요틴 톱을 시작으로 3D 프린팅 기술로 의상을 제작하고 있다. 펭 시스템은 작년 말부터 올해까지 르세라핌, 베이비몬스터, 블랙핑크, 에스파의 신곡 뮤직비디오에 빠짐없이 등장하면서 비교적 늦게 소개된 브랜드임에도 빠른 속도로 우리나라에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중이다.
같은 아시아 디자이너라도 보이 그룹이 반응하는 스타일은 또 다르다. 코르티스가 MAMA 2025 공연에서 입은 라투이 아틀리에(Latui Atelier)의 오버사이즈 배기 진은 거친 스트리트 느낌을 물씬 풍긴다. 패션을 전공한 씨 꽌 레(Xi Quan Lê)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동하다가 론칭한 이 브랜드는 어두운 세기말 분위기로 가득하다. 이제 막 관심을 끌기 시작한 단계지만 디스트레스드 처리한 오버사이즈 캐주얼 아이템과 고딕풍의 페미닌한 아이템의 완성도가 높아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 팝 아티스트의 입질이 이미 시작됐다. 대표 아이템인 페인트 자국 데님에 대한 심오한 설명을 들어보자. “이건 해체와 재건, 상처 받은 영혼의 기억을 새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아시아 여러 나라 중에서도 유독 베트남 디자이너들이 각광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베트남은 섬유 의류 산업이 국가 경제의 핵심 산업인 만큼 관련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고, 수준 높은 맞춤복 시장으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손기술 좋은 인력이 많아서 보통 며칠씩 걸리는 맞춤복을 하루이틀 만에 완성하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공연을 할 때 불편하지 않도록 꼼꼼하게, 빠른 속도로 제작하는 게 기본인 아이돌 의상의 세계에서 베트남 디자이너와의 협업은 최고의선택처럼 보인다. 게다가 중국과 태국에 이어 세 번째로 K-팝 팬이 많은 국가라는 점도 협업 과정을 순조롭게 만들 것이다. 코로나 직후에 시작된 K-팝 아이돌의 베트남 디자이너 사랑은 지금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내는 그들은 신데렐라의 재투성이 옷을 아름다운 드레스로 바꿔준 요정 대모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신데렐라에게 어울리는 드레스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신데렐라가 먼저 그들의 드레스에 싫증을 낼지도 모를 일. K-팝 아이돌의 다음 사냥터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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